현대,사태 수습할 주체가 없다…통제력상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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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기진맥진하고 있다.

계열분리를 조기 이행하겠다는 `선언'으로 시간을 벌어보려던 전략도 정부의 일갈(一喝)에 파묻혀 버렸다. 더이상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시장의 요구에 화답하라는 정부의 주문은 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현대 관계자들은 정부의 고강도 수습책이 공개된 2일 하루 구수회의를 거듭하며 대책을 논의했지만, 방향타를 잃어버린 듯휘청대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 안이한 대응이 화근 = 현대는 두 주 전인 지난달 24일 한기평이 신용등급을 `강등'했을 때만 해도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하며 두차례나 항의단을 보냈다.

자구노력을 성실히 이행하는 기업을 왜 흔드느냐는 논리다. 그러다가 정부와 채권단에서 유동성 지원대가로 ▲조기 계열분리 ▲사재출연 ▲가신청산 등 고단위 수습방안이 흘러나오자 위기감을 감지한 듯, 자동차 계열분리 방안을 정부의 `뜻'에 따라 마련하겠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회사는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제스처도 나왔다. 결국 현대가 백기(白旗)를 든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정부는 현대가 또다른 시간벌기를 하는 것으로 보고 압박수위를 더욱 높였다. 8월말까지로 못박은 계열분리 제출시한이 정부와 시장을 달래기에는 너무 늦은 시한인데다 실현 가능성도 회의적이라는 반응이다. 결국 시도는 좋았지만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은 셈이다.

특히 사태해결에 열쇠를 쥔 정몽헌 현대아산 의장이 차일피일 귀국을 늦추면서 돌연 7일 방북하겠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다. 결국 현대의 이같은 대처가 사태를 정 전명예회장 3부자 동반퇴진 선언 직전인 5월말로 시계바늘을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다.

◇ 통제력 상실한 현대 = 사태가 풍전등화 상태로까지 발전하고 있어도 현대 내에서는 이를 풀어나갈 `주체'가 없어보인다는 관측이다. 대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하는 구조조정위원회는 `실권'이 없어 수습능력을 기대하기 힘들다는게 주변의 시각이다.

MH 진영의 핵심가신으로 그룹의 자금줄을 관리하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사정당국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제 살길에 바쁜 눈치다. 결국 실질적 오너인 MH에게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그 역시 기대난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현대 관계자는 "MH가 정부와 담판을 지어 해결하려면 왜 지금까지 안들어왔겠느냐"며 "귀국하더라도 상황이 크게 나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MH는 당초 2일 귀국하려던일정을 다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그동안 침묵해온 그룹 내부에서조차 정부와 시장의 요구를 시급히 따라야 한다는 여론이 조심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이대로 가다가는 현대 계열사 전부가 공멸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다.

◇ 현대 향후 대응은 = 현재 분위기대로라면 현대가 당장 정부의 주문에 화답할수 있는 카드는 찾기 힘들다. 다만 자동차.중공업 계열분리안이 그나마 현단계에서 쉬운 대안에 속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현대는 자동차 계열분리의 전제조건인 정전명예회장의 자동차지분 정리와 관련, ① 지분을 채권단에 담보로 위탁하는 안 ②사회지도급 인사에게 맡기는 안 ③ 아산사회복지재단에 양도하는 안을 공정위측에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③안은 현행 공정위법에 저촉됨에 따라 ①②안으로압축되고 있다. ①안의 경우 채무상환에 따른 지분 환수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의결권을 포기한다는 공증각서를 제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중공업 계열분리도 당초 2003년까지 약속한 시한을 앞당기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재출연과 돈되는 계열사 매각 등 고강도 자구계획 ▲가신그룹 청산문제 등은 납득하기 힘들다는게 현대의 주장이다. 현대 구조위 관계자는 "이미 충분한 자구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런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흥분했다. 우선 사재출연 문제가 거론되는데 대해 극력 반발하는분위기다. 현대는 "사재출연은 부도난 기업주가 경영실패에 따라 책임을 지는 해법으로 지금 상황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시각으로 볼 때 사재출연은 `필수조건'에 해당한다는 관측이 높다. 특히 정몽헌 의장의 상선지분 13.44%와 현대건설의 상선지분 12.6%는 반드시 조속히 매각, 현대건설 유동성 지원에 활용해야 한다는게 정부의 주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 의장이 상선을 통해 전자.증권 등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를 깨고 실질적으로 경영에서 물러나야한다는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전자 등 돈되는 계열사 매각도 무리한 요구라는게 현대의 입장이다.

이익치 회장등 가신그룹 청산은 이사회와 주총 등 공식적인의결기구를 통해 이뤄질 문제이지, 정부가 특정인에게 퇴진을 강요하는 것은 비자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고강도 압박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현대가 계속 버티기로 일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돌연 등장한 3부자 퇴진론 =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측이 돌연 3부자 퇴진이행을 촉구하고 나선데 대해 현대 안팎에서 논란이 나오고 있다. 특히 금감위쪽은 3부자 퇴진을 거론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채권단과 금감위가 의견충돌을 빚는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단계에서 3부자 퇴진론의 골자는 결국 MK(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퇴진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현대사태의 기저에 형제간 내분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대두된 해법과는 다른 차원이어서 의아스러워하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MH쪽의 자구노력에 집약됐던 현대사태 해법이 분산되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MH쪽이 `우리만 당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의도적으로 MK를 끌어들이려는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서울=연합뉴스)노효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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