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통합 발 뺀 캐머런 ‘영웅’인가 ‘자살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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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복장·제스처와 합성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사진이 영국 타블로이
드지 더 선 10일(현지시간)자 1면에 게재돼 있다. [런던 AFP=연합뉴스]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45) 총리가 8~9일(현지시간) 브뤼셀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새 재정협약을 거부했다. 26대1. EU 회원국 중 유일했다.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는 “캐머런 총리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비꼬았다. 니콜라 사르코지(56) 프랑스 대통령은 아는 척하는 캐머런 총리를 그냥 지나갔다. <관계기사 e3면>

 일부 영국인은 캐머런 총리의 행보에서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떠올렸다.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 선은 10일자 1면에 처칠 복장으로 합성된 캐머런 총리 사진을 실었다. ‘불도그 총리가 영국을 방어했다’는 제목도 달았다. 처칠은 “유럽과 함께하지만 유럽에 속하지 않은 영국”을 말하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럽 모든 나라가 굴복한 뒤에도 영국만은 계속 싸우게 한 게 처칠이었다.

 캐머런 총리는 그가 속한 보수당에서 영웅이 됐다. 귀국 만찬에서 보수당 의원 30여 명은 캐머런을 위해 건배했다고 영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번 결정에는 유럽 통합 세력인 독일·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견제 의식, 일종의 세력균형 감각도 작용했다. 영국 보수당 연립정부는 회원국에 대한 EU의 재정 통제 강화가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본다. 보수당 의원 상당수는 1999년 노동당 정권이 EU로 넘긴 노동시간 통제 등 각종 권한을 되찾고 싶어한다. 캐머런 총리 자신도 유럽통합 회의론자다. 그는 EU의 금융거래세(일명 토빈세) 도입 움직임에 강력 반대했다. 금융거래세는 금융회사 거래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EU에 있을 경우 거래액의 0.1%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그는 금융거래세가 EU에만 적용될 경우 런던의 금융회사들이 세금을 피해 미국·홍콩 등으로 떠날 것을 우려했다.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영국의 성장 엔진이다.

 야당과 산업계에서는 ‘영국을 유럽 내에서 고립시켰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당수는 “앞으로 유럽 내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유럽의 위대한 이혼(Europe’s great divorce)’으로 표현했다.

 특히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민당(The Liberal Democrats)의 당수인 닉 클레그 부총리조차 강한 불만을 표시해 눈길을 끌었다. 내각의 일원인 빈스 케이블(자민당) 상무장관도 “영국이 자살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자민당 의원들은 연정 내부 논의가 없었음에도 연정 전체가 합의한 것처럼 비치는 것에도 화가 나 있다. 찬반 양론이 양립하는 가운데 일간 데일리 메일의 여론조사 결과 62%는 총리의 결정을 지지했다. 반대는 19%에 불과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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