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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만의 잘못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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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되풀이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섯 정권 모두 임기 말이 가까워 오며 지지율 추락, 여당 내의 분열과 파열음, 국정이 표류하는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5년 임기에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국정을 주도하는 기간은 3년여밖에 되지 않으니 국가 지배구조가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4년 차가 되면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온통 차기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기와 여론몰이가 되면 정책의 합리성과 효율성은 헌신짝처럼 내던져진다. 이것을 단지 대통령과 정치인의 자질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국회의원 개인들의 면면을 봐도 대부분 우리 사회의 엘리트 출신이다. 지난 다섯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잘못된 사람들로 연속해 뽑았다면 그것은 우리 국민의 잘못인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가진 제도가 잘못됐거나 그 제도를 운용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이에 대한 반성과 대책을 깊이 논할 때도 됐으나 지금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다시 내년 총선과 대선으로 온통 밀려 가 있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초반에 국회를 비롯해 개헌에 대한 여러 연구모임이 활동했으나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런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우리 국민은 이런 상황을 모두 정치인과 대통령의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 위로하고 싶을지 모르나 실상 이 상황의 궁극적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라고 자부하나 과연 그런가? 산업화에는 분명 성공했지만 아직 진정한 민주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산업화 과정은 서구의 기술과 생산방식을 도입해 서구와 똑같은 제품을 제조해 내며 성공했다. 제품은 모방으로 생산이 가능하고, 사회의 철학과 전통을 소화해 낼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제도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해방 후 서구식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모방·도입했으나 정작 이 제도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의 전통과 문화에 생소한 제도였다. 강영훈 전 총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를 ‘대나무에 소나무를 접목시킨 것과 같다’고 기술했다. 아마 그 때문에 6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의 논쟁이 일어나고, 80년대까지 독재체제가 지속됐을 것이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국민은 정작 우리가 원하며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꾸기 위한 노력은 더욱이 부족했다. 민주주의를 개인의 자유와 권익의 확대로만 해석했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언론과 토론문화의 절제와 공정성 없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서구에서도 언론의 절제와 공정성 시비가 많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낫다. 아마도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신장될 때 결투제도라는 것이 남아 있어 상대방을 부당하게 비판할 때는 자기 목숨도 걸어야 하는 부담이 절제를 익히게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링컨과 헤밍웨이도 상대를 비방하는 글을 실었다가 결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잭슨 대통령은 결투에서 가슴에 관통상을 당해 평생 고생했으며, 해밀턴 재무장관은 결투에서 죽었다. 서구에선 명예를 훼손당했을 때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19세기까지 사회적으로 용인됐다. 아마 지금 한국에 결투제도가 있다면 수많은 언론인과 정치인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책임과 절제를 규율한 나름대로의 사회적 기제들을 서구 사회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기제 없이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국민 스스로가 이에 대해 높은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

 정당은 대의민주주의를 받치는 기둥이다. 정당이 각자 추구하는 가치에 뿌리를 두고 국민의 갈망을 담아내 새 비전과 정책의 산실 역할을 할 때 혁명 없이도 국가 개혁과 발전이 가능해진다. 여당이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해서 당을 깨거나 새로운 간판을 달고 선거에 나서려는 행태가 되풀이되는 한 민주주의의 성숙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도 중요하다. 정부와 국회가 남은 1년을 허비하지 않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좋다. 차기 대선주자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확대해석을 달고, 정치싸움을 부추겨 흥미를 끌기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 어떻게 국가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정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로 언론이 정치권을 몰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이 지나치게 상업성에 경도되거나 스스로의 권력을 추구할 때 국민은 그런 언론을 외면해 버리는 의식과 용기를 가져 줬으면 좋겠다. 어떤 언론과 정치를 갖는가는 결국 국민의 책임이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