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문제적 여성, 궁녀를 사랑한 봉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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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채홍』은 인터넷서점 인터파크에 올 9월부터 3개월간 연재된 동명의 소설을 엮은 것이다. 김별아씨는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문학적 상상력이 많이 자극됐다”고 했다. [뉴시스]

이런 홍보문은 거슬린다. ‘『조선왕조실록』유일의 왕실 동성애 스캔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빤한 속내가 우리의 미감을 거스른다. 이것은 동성애를 수군대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다.

 소설가 김별아(42)씨가 장편소설『채홍(彩虹)』(해냄)을 냈다. 조선 문종의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봉빈)의 사랑과 욕망을 담았다. 소설은 『실록』의 짤막한 문구에서 출발했다.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세종실록』1436년 10월 26일자)

 이 짧은 팩트를 근거로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뻗어나갔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렇다.

 봉빈은 세종의 장남인 세자 이향(문종)과 혼례했으나,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 했다. 세자는 마음을 열지 않고, 다만 의례적인 합방만을 드문드문 이어갈 뿐이다. 봉빈은 점차 지독한 외로움에 내몰린다. 처연한 외로움 속에서 봉빈은 궁녀 소쌍과 금지된 사랑에 빠져든다. 순빈 봉씨는 여자를 사랑한 죄로 폐위되고, 둘째 오빠의 칼에 죽는다. 봉빈은 “사랑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사랑으로 죽겠다”며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아, 사랑은 두려워라. 결핍을 메우는 것이 사랑일진대, 그 결핍을 채우는 일이 죄가 되는 세상이라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삶을 버텨야 하는가. 5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김씨와 마주 앉았다.

 -사랑이 억압된 여성이 주인공인데.

 “유교와 성리학을 강조한 조선에선 왕실의 여인들이 가장 큰 희생양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랑 자체가 죄가 됐던 시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사랑의 욕망이 거세된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성애 설정이 자극적인 건 아닌가.

 “관음증을 자극하려는 게 아니다. 봉빈의 욕망이 거세당하다가 마침내 그 모든 억압을 깨뜨릴 때의 감정을 공유하길 바랐다.”

 김씨의 2005년 세계문학상 수상작『미실』은 20만권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채홍』의 봉빈은 문제적 여성이란 점에서 미실을 닮았다. ‘무지개’란 뜻의 ‘채홍’은 성 소수자의 국제적 상징이기도 하다. 김씨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선의 여성들을 더 발굴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이란 덮어놓고 빠지는 것일 게다. 성(性)의 빛깔도 사랑 앞에선 무용하다. 소설 속 봉빈은 말한다. “역사는 사랑을 기록하지 않지요. 사랑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기억으로 제각각 다른 빛깔로….”

 그렇다면 문학의 일이란, 기록되지 못한 사랑을 기어이 기억하는 것일 테다. 『채홍』은 동성애를 수군대지 않는다. 기록되지 못한 어떤 빛깔의 사랑을 가만히 기억하고 있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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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소설가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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