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없는 살인 25시간 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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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판사의 발언이 이어지는데 가운데 배심원 두 명은 졸음을 참지 못한 듯 연신 꾸벅이고 있었다.

 30일 오전 11시 서울 동부지법 형사11부(부장 설범식) 심리로 열린 국민참여재판의 풍경이다. 전날인 29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재판은 밤을 꼬박 새우고 25시간 동안 이어졌다. 식사와 휴식을 위한 휴정이 재판 중 있었지만 ‘마라톤 재판’은 모두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새벽 무렵 휴정을 틈타 배심원은 짧은 잠을 청했고 방청석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재판이 길어지자 법정 서기관은 눈을 감고 손가락만 움직여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대법원 홍동기 공보관은 “국민참여재판을 하면서 재판이 밤을 넘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24시간을 넘겨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날은 2000년 11월 강원 평창에서 비닐제조업체를 운영하던 강모(당시 49세)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서모(49)씨와 김모(46)씨에 대한 선고가 예정돼 있었다. 살인 사건에 결정적인 증거인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공범들이 범행을 자백한 점이 이들의 구속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4월 당시 업체 직원이던 양모(59)씨가 “서씨와 김씨가 강씨의 팔을 잡은 상태에서 내가 흉기로 때려 숨지게 했다”고 진술했다. 지난 5월에는 또 다른 김모(57)씨가 “양씨 등 4명이 살인을 모의하고 실행했다”며 경찰에 자수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수사 기관의 증거로는 충분치 않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자수한 김씨는 이날 재판에 증인 신분으로 참석했다.

 11년 전에 벌어진 살인, 시신조차 못 찾은 채 열린 재판이라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이 치열했다. 하지만 새벽 시간이 되면서 재판부와 배심원은 조금씩 지친 모습을 보였다. 검찰 측은 “11년간 끌어온 미제 사건을 이번에 끝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며 의견 진술을 1시간30분 동안 진행했다. 재판부는 “이제 발언을 5분 내로 마쳐 달라”고 요청했다. 배심원들도 “이번으로 재판을 꼭 끝내자”는 의견을 재판부에 전달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중간중간 고개를 떨궜다.

 검찰은 결정적 물증이나 시신 부검 없이 진술과 정황 증거에 의존해 살인 혐의를 입증해야 했다. 피고인들은 “사체를 옮긴 것은 맞지만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강도살인은 공소시효가 15년이지만, 사체 유기는 5년이다. 검찰과 변호인이 가장 첨예하게 맞선 부분은 증인 김씨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느냐 여부였다. 변호인은 “질병이 있는 증인 김씨가 ‘잘못 진술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는 등 진술이 오락가락한다”는 의견을 냈다. 검찰은 “정신과 치료는 받은 적 없고 살인 정황에 대한 진술은 일관적”이라고 반박했다. 또 암으로 숨진 공범 양씨의 행적도 논란이 됐다. 양씨는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 숨진 강씨의 형에게 돈을 요구했다.

 검찰은 두 피고인에게 무기 징역을 구형했고, 변호인은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재판을 맡은 서울동부지법 형사11부는 “수사 기록이 방대해 자세한 증거 확인 절차를 통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겠다”며 “선고를 다음 달 2일로 연기한다”고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배심원들도 평결 과정에서 의견이 갈렸다”고 전했다.

 이정봉·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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