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방송사, ID노래대로 실천한다면…

중앙일보

입력

TV를 틀면 쏟아져 나오는 건 드라마나 뉴스, 혹은 쇼나 다큐멘터리뿐만은 아니다. 소란스런 광고나 예고편이 끝나면 어김없이 계절의 풍광과 엮여 다가오는 게 있다. 이른바 ID송이다.

10초가 채 안되는 짧은 노래지만 길이와 상관없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프로그램 사이의 이음새 역할을 하는 것뿐 아니라 각 방송사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시청자에게 고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그대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해당한다. 삶의 테마이자 철학 내지는 좌우명을 담고 있는 게 방송사의 ID송이다.

왜 하필 그것이 노래의 옷을 입고 있는가. 악보 속에 갇혀 있는 노래는 죽은 노래다. 마치 도서관 서가에 붙잡혀 있는 책의 신세와 같다.

불러야 노래이고 펼쳐야 책이다. 죽은 노래와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살아있는 인간의 호흡과 시선이다. 노래를 부른다는 건 사라지거나 잃어버린 세상을 불러내는 행위다. 흔들리는 세상을 가라앉히는 주문이기도 하다.

각 방송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러내는' 세상의 모습과 그 진의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손바닥만한 ID카드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한다면 열 자 안팎의 ID송(어떤 것은 속삭이고 어떤 것은 외친다)은 방송사의 정체성을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무심코 들으면 CM송 비슷하지만 결코 상업적 메시지는 없다. 여럿 가운데 가장 흔한 몇 개의 노랫말을 들여다보자. KBS는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이다.

MBC는 '만나면 좋은 친구' 이고 SBS는 '기쁨 주고 사랑 받는' 방송이 도달하려는 목표이다. 그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살 만한 세상인가.

십 년 전쯤 MBC에서 '일요일 일요일 밤에' 를 연출할 때의 일이다. 어느날 시청자로부터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담당자라고 밝히자 대뜸 "함부로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라고 요구했다. 이야기인즉 당시 이경규가 한 꼭지를 진행하며 그 첫머리에 '몰래카메라를 사랑하시는 국민 여러분' 이라고 말하는 게 영 거슬린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하고 싶으면 '몰래카메라를 사랑하시는 시청자 여러분' 이 어떠냐고 대안까지 제시하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국민의 방송이라고 말, 혹은 노래부르려면 정말로 국민을 위하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거야 기분 좋은 일이지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분에 따라 계획하고 배치하는 일은 말아야 한다. 적어도 국민의 방송이라면 말이다. 걸핏하면 정치인들이 하는 말 중에 '국민의 뜻이라면' 이라는 게 있었다.

그가 말하는 국민의 범주에 내가 기쁘게 포함된 기억이 거의 없다. 국민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게 아니다.

MBC는 좋은 친구를 표방한다. 친구는 이익을 위해 자존심을 팔지 않는다. 참된 우정은 친구를 이용하지 않는다. 외로울 때, 고통받을 때 떠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자가 좋은 친구다.

SBS는 보다 높은 이상을 노래한다. '기쁨 주고 사랑 받는' 일이야말로 모든 착한 삶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기쁨이라는 식탁엔 맛과 영양을 고려한 식단이 짜여야 한다. 빛깔만 곱고 달콤하기만 한 음식으로는 진짜 사랑을 생산할 수 없다.

헤어진 지 50년 된 사람들을 단 하루 만에 확인시켜 주는 게 텔레비전이다. 그 막강한 힘을 좋은 데 쓰도록 다짐하고 또 실천해야 한다. 노래가 살아 움직이려면 그 노래에 담긴 착한 뜻을 이뤄내기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방송, 기쁨 주고 사랑 받는 친구 같은 방송이 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