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혁명 아시아 정부·기업체질 확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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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IT) 혁명이 아시아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체질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며 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3년 전 아시아를 휩쓸고 간 경제위기 이후 각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프로그램에 따라 구조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불투명성·비효율·독점 등 수십년간 계속돼 온 병폐를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IT 산업이 투명성과 경쟁 원리를 전파시키며 경제 시스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거대 통신회사부터 집앞 슈퍼마켓까지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앞다퉈 가격 인하와 서비스 경쟁에 나서는가 하면, 젊은 고급 인력들이 IT 분야에 속속 진출해 과거 인재를 독점했던 대기업들을 긴장시키는 모습이 크게 늘고 있다. 또 금융·기업 등 각종 정보 획득이 용이해지면서 확실한 수익을 보장해 주는 효율적인 투자 방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투명한 경영과 재무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투자자를 확보할 수도, 돈을 빌릴 수도 없게 됐다.

홍콩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아자이 카푸르는 “아시아의 기업들은 아직 지배 구조와 투명성 등에서 서구 기업들에 뒤져 있지만 IT 산업의 발전과 확산이 그 차이를 빠르게 줄여 주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시아의 전반적인 경제 여건은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은행들은 부실에 신음하고 있으며 혈연·지역주의가 청산되지 않고 있다. 경제 위기 당시 막대한 빚더미를 안게 된 기업들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통신 산업의 규제 완화. 아시아 각국 정부가 미래의 전략 산업으로 인식하면서 업종 제한을 풀고 가격 자유화 정책을 편 결과 빠른 속도로 경쟁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가장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은 싱가포르 정부로 지난 4월 통신 시장을 완전 개방, 외국인들의 지분소유 제한 규정을 없애고 다국적 기업들의 새로운 서비스 제공을 허용키로 했다. 한국은 싼 요금의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와 온라인 주식 거래가 인터넷 붐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2001년까지 정부 조달 품목의 51%를 온라인상에서 해결할 계획이다. 구매 절차가 투명해지면 과거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나 밀실에서 이뤄지던 검은 거래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

정부와 재벌과의 유착으로 변화가 더디던 말레이시아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예외없이 불고 있다. 마하티르 수상의 소속 정당과 유대 관계에 있던 르농그룹은 입찰 및 자재 조달을 온라인으로 해결할 건설회사간 컨소시엄을 만들어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는 한편 조달 비용을 10%까지 줄이고 있다.

금융 시스템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은행들은 기업 토지를 담보로 잡던 대출 관행에서 벗어나 사업 아이디어나 특허를 심사해 돈을 내주고 있다. 보다 투명한 기업 공개가 요구되는 벤처캐피털·주식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도 늘고 있다.

골드만 삭스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는 전체 자금조달액 가운데 85%가 주식 시장을 통해 이뤄졌다. 1996년의 6%와 비교할 때 큰 폭으로 증가했다. 기업 설명회(IR)를 철저히 무시했던 태국의 시암 시멘트는 웹 사이트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자세한 경영 실적과 구조조정 정보 등을 제공하고 있다. 시암측은 “보다 빠르고 투명한 기업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경영 성과 및 주가 상승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며 “인터넷을 이용해 효율적이고 간편하게 회사를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IT 혁명은 인적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도 돕고 있다. 미국의 나스닥을 본따 첨단 기술주를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증시가 속속 개설되고 성공 신화를 꿈꾸며 자신의 사업체를 일으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삼성의 한 컴퓨터 사업 부문은 지난해 20%의 엔지니어들이 벤처 기업 등을 찾아 회사를 떠났다. 취리히 파이낸셜 서비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데이비드 헤일은 “IT 혁명이 아시아의 재도약을 이끄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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