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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사회 유쾌한 도전 나는 고졸 사원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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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01면

포스코 제강공장의 취련사인 정병수씨가 방열복을 입고 전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쇳물을 정제하고 성질을 결정하는 취련사는 대개 전로 운전실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작업한다.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3년 전 입사했다.

잘 익은 홍시 빛깔의 쇳물이 기울어진 전로(轉爐)에 쏟아진다. 불꽃이 튀고 검은 연기가 솟구친다. 배를 채운 전로가 서서히 바로 서자 운전실 사람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순도 99%의 산소를 불어넣어 탄소·황·인 등 불순물을 태우고 합금철을 투입해 용도에 맞는 쇳물로 바꾼다. 철광석을 녹인 쇳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순도 높은 ‘산업의 쌀’로 다시 태어난다. 경북 포항 포스코 제2제강공장에서 근무하는 정병수(23)씨의 일이다. 그는 제철소의 취련사(吹鍊士)다.

정씨는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2009년 포스코에 입사했다. 진로는 일찌감치 결정했다. 중학 3학년 때 어머니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 공고에 진학 후 취업하겠다고 했다. 집안사정이 어렵기도 했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얻은 병으로 평생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그런 사정 못지않게 홀로서기를 일찍 하고픈 마음이 컸다. 형은 대학을 갔지만 형제라고 다 똑같을 수 없지 않은가. 포스코 입사는 어렵지 않았다. 고교 시절 자격증을 23개나 취득했다. 학업성적은 상위 6%권이었는데 학생회 활동 등 각종 내신을 합산한 졸업성적은 전교 1등이었다.

제강공장의 근무환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클린 사업장’을 표방해도 전로 바로 옆의 소음과 탁한 공기는 부득이했다. 기자가 정씨를 촬영하려고 전로 주변에 잠시 머무는 동안 카메라에는 검은 쇳가루가 쉴 새 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정씨는 일에 집중해 그런지 둔감한 듯했다. 펄펄 끓는 300t의 쇳물을 정제하고 성질을 바꾸는 일이 40분 주기로 반복되는데, 매번 순도·성분·온도 등 목표를 세우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짜릿한 성취감을 느낀다. 그의 선배 취련사이자 멘토인 강호근(34)씨는 정씨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정씨는 우리나라 기술직 걱정도 한다. 대뜸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에 그의 위인전을 읽었어요. 다른 건 다 잊었는데 기술직이 천시당했다는 것만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포철공고의 전신 포항공고는 1970년대엔 중학교 상위 5%만 입학할 수 있었죠. 현재는 50%만 돼도 들어갑니다. 현장 기술자들이 대우를 받지 못하니까요.” 명쾌한 해결책도 내놓았다. “돈이죠. 학력이 아니라 능력에 맞게 급여를 받는다면 굳이 다들 대학에 가려고 할까요.” 정씨가 근무하는 전로 운전실에는 대졸자가 없다. 그의 고교 동기 중 대학에 진학한 친구는 10% 정도다. 그들도 요즘 만나면 어디 취직할 데 없냐고 하소연이란다.

입사 3년차인 그의 연봉은 4000만원 정도다. 만족한다고 한다. 분위기가 자유롭고 고용안정성이 높은 회사에 대해 자부심도 느낀다. 주변에서는 “이제 장가만 가면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우선 외국어 공부가 급하다. 현재 765점인 TOEIC 성적을 850점으로 올리고 일본어와 중국어도 공부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공부가 재미있고 좋아하는 여행을 하자면 외국어가 필요하다. 가본 나라 중 호주가 기억에 남는데 농장 노동자 같은 이른바 ‘노가다’들도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업무 관련한 공부도 열심이다. 전문가로 인정받고 높은 자리에 승진도 하려면 기술사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금속재료 산업기사 자격을 따는 것이 당면 목표다.

장래의 꿈은 무얼까. 거침없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장(長)이 되고 싶다”고 한다. 회사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사장이나 회장도 포함된단다. 고졸 학력이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고 묻자 “남들이 간 길이면 쉽게 갈 수 있지만 안 간 길이면 헤쳐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래도 회장까지?”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꿈은 높게 가져야죠. ‘장’ 중엔 부장도 있으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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