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핵무기 선수 치면 재앙” … 망명지 미국서 원자로 개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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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28면

스티브 잡스는 “생각을 단순화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단순화가 최고다. 과학도 그렇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으로 보면 과학 전체가 정말 단순하다고 했다. 과학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첫 원자로 만든 이탈리아 과학자 페르미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물리학 연보’에 실었다. 그런데 뭔가 빠졌다. 3장의 보충 논문을 다시 써 보냈다. 그 마지막 네 문단에 공식을 적었다. E=mc². 실험 없이 생각만으로 식을 유도했고, 이 식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꿨다.

‘원자력’이란 중성자에 부딪힌 원자핵이 분열되거나 융합될 때 나오는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가 E=mc²이다. 에너지(E)는 질량(m) 곱하기 빛의 속도(c)의 제곱이다. 아주 작은 질량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거대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

핵분열 현상을 실험으로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독일의 오토 한이다. 실험 계획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여성과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세웠다. 그들은 1938년 말 중성자로 충격을 준 우라늄에서 라듐의 변형체가 생기는지를 보려 했다. 라듐 파편을 모으려고 바륨을 접착제로 사용했다. 일단 사용이 끝나면 바륨을 산으로 씻어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바륨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우라늄 핵이 쪼개지면서 바륨이 생긴 것이었다. 마이트너는 이것을 핵분열이라고 명명했다. 오토 한은 1939년 1월 6일 이 결과를 발표했다.

1월 16일 이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사진)는 두 가지를 간파해냈다.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다. 그는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키면 새로운 방사능 물질이 생기고 ▶느린 속도로 원자에 충돌시키면 중성자가 원자핵 내부로 들어가 핵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을 이론과 실험을 통해 발견해 수상했다.

그는 불과 보름 전쯤 미국으로 탈출해온 터였다. 1938년 12월 10일 그는 스톡홀름의 노벨상 시상식에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그러나 조국 이탈리아가 아닌 미국행을 택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독일의 히틀러와 손잡고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인종법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페르미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아내 로라와 두 자녀는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벨상 시상을 이유로 가족과 출국했다 배편으로 1939년 1월 2일 미국으로 온 것이다.

그가 오토 한의 실험에서 간파해낸 것은 ▶핵분열이 이뤄진다면 매우 큰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며 ▶이때 몇 개의 중성자가 방출돼 이것이 다음 번 우라늄에 충돌해 연쇄반응이 생길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핵무기의 원리였다.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시기. 그는 위험성을 직감했다. 나치가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면 큰일이다.

유럽에서 망명 온 물리학자들이 그와 함께 움직였다. 헝가리에서 망명해 온 질라드·위그너·텔러 등이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페르미의 연구 결과를 얘기했다. 그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래서 우라늄문제 자문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페르미는 시카고대로 옮겨 대규모 연구진을 꾸렸다. 핵분열 물질은 우라늄 238이 아니라 0.7%뿐인 우라늄235라는 점, 핵분열 시 나오는 중성자는 속도가 너무 빨라 감속제가 필요하다는 점, 중성자를 자유로이 제어할 흡수제가 필요하다는 점 등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마침내 전망이 섰다. 1941년 12월 시카고대의 스쿼시경기장 지하에 최초의 원자로건설 작업이 시작됐다. 책임자는 엔리코 페르미. 원자로에는 불순물이 없게 특수 제작된 4만 개의 순수 그라파이트(흑연) 벽돌 450t과 45t 카드뮴 제어봉이 들어갔다. 중성자를 감속시키고 흡수해 핵반응을 제어하기 위해서다. 그 안에 농축우라늄 수t을 넣을 2만2000개의 구멍이 뚫렸다. 1년여 만에 원자로가 완성됐다. 이 최초의 핵반응로 이름은 ‘시카고 파일-1’이었다.

그리고 1942년 12월 2일 오후 3시25분 가장 위험한 최초의 원자로 연쇄핵분열반응 실험이 행해졌다. 28분 동안 1/2와트의 전력을 생산했다. 실험 성공. 원자핵의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간이 원자핵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페르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전쟁 뒤 시카고대 연구소로 돌아왔다. 수소폭탄 개발에는 반대했다. 페르미는 1901년 9월 29일 로마에서 태어나 54년 11월 28일 미국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천재였다. 이론과 실험에 모두 정통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노는 “그가 일찍 태어났다면 러더퍼드의 원자모형과 닐스 보어의 이론도 그가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67년 설립된 국립가속기연구소도 그의 이름을 따서 74년에 페르미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 에너지 개발과 생산에 업적을 이룬 세계의 과학자에게 주는 상 이름도 엔리코 페르미 상이다. 원자 번호 100번 원소는 그를 기려 페르뮴으로 명명되었다. 2017년 완공 예정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가 기초과학 중흥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는 이번 회로 끝납니다. 다음주부터는 한국과학문화진흥회 김제완 이사장과 연세대 생화학과 송기원 교수의 과학 이야기가 번갈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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