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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8) - 짐 바텀리

중앙일보

입력

브랜치 리키는 야구 역사에서 실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팜 시스템을 최초로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팜 시스템이 맺은 최초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다수의 야구 역사가들은 “짐 바텀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텀리는 현대 야구 팬들에게는 많이 잊혀졌지만, 1920년대에는 빌 테리와 함께 NL에서 가장 뛰어난 1루수였다. 당시 AL에 루 게릭이라는 거물 1루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그는 2루수 로저스 혼스비와 투수 제시 헤인스 등과 함께 1920년대 카디널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며, 한 경기(9이닝) 최다 타점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쾌활하고 친절한 성격으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Sunny Jim”이라는 별명은 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신인들이 실수를 저지르거나 부진할 때에 항상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그의 존재로 인해 카디널스는 난폭한 성격의 혼스비가 팀에 끼치는 악영향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바텀리는 청소년 시절 철물 공장 견습생이었으나, 세미 프로 야구팀에서 활약하던 중 카디널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카디널스의 단장이었던 리키는 마이너 리그 팀들을 카디널스 산하로 끌어들여 최초의 '팜 시스템(Farm System)'을 구축한 상태였고, 바텀리도 카디널스에 입단한 뒤 이 팀의 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2년 그는 마이너 리그의 시러큐스 스타스에서 맹타를 휘둘렀고, 결국 시즌 막판에 빅 리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잭 퍼니어를 밀어내고 팀의 주전 1루수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풀 타임 메이저 리거로서 맞은 첫 시즌인 1923년에 타율 부문에서 팀의 간판 스타 혼스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이 시즌 이후 확고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24년에는 그의 활약이 다소 주춤한 듯 보였으나, 9월 16일 그는 야구 팬들을 경악시켰다. 브루클린 로빈스(LA 다저스의 전신)를 상대로 한 어웨이 경기에서 그는 1회의 2타점 적시타를 시작으로 2회에 2루타, 3회에 만루 홈런, 6회에 투런 홈런, 7회에 2타점 적시타, 9회에 1타점 단타를 차례로 터뜨렸다.

그가 이날 올린 타점은 12점으로, 한 경기 개인 최다 타점 기록이었다. 이전까지는 로빈스의 감독 윌버트 로빈슨이 1892년 세운 11타점이 최고 기록이었는데, 로빈슨은 자신의 기록이 깨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바텀리는 이듬해인 1925년 다시 타격왕에 강력히 도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혼스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전년도에 20세기 NL 최고 기록인 .424의 타율을 기록한 바 있었던 혼스비는 1925시즌에 또다시 4할을 넘기며 타격왕 6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고, 바텀리는 타격왕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다만 바텀리는 안타 부문에서 227개, 2루타 부문에서 44개로 수위에 올라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26년 바텀리는 처음으로 3할을 밑도는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리그 타점왕에 오르는 동시에 2루타 부문을 2연패하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뉴욕 양키스였고, 바텀리는 시리즈에서 10안타를 치는 맹활약을 하여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바텀리는 1928년 다시 리그 타점 1위 자리를 탈환했고, 20개의 3루타를 날려 이 부문에서도 수위에 올랐다. 또한 그는 같은 31개의 홈런을 쳐낸 시카고 커브스의 핵 윌슨과 함께 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결국 시즌 후 그는 NL MVP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 해에 카디널스는 다시 리그 정상을 차지하였고,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와 재대결하게 되었다. 바텀리는 1차전에서 0-3으로 끌려가던 7회에 양키스의 에이스 웨이트 호이트로부터 솔로 홈런을 뽑아냈으나, 그 홈런이 결국 1차전에서 카디널스가 친 유일한 득점타가 되었다. 이후 시리즈 내내 바텀리는 부진했고, 카디널스는 양키스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1929년에도 바텀리는 137타점을 기록하는 등 여전히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나, 이듬해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텀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팜에서 올라온 젊은 유망주 립 콜린스가 주전 자리를 노릴 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두 선수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1930시즌에는 콜린스의 출장 횟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바텀리가 팀이 치른 경기 중 대부분인 131경기에 출장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바텀리는 필라텔피아 애슬레틱스와 격돌한 월드 시리즈에서 22타수 1안타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고, 결국 카디널스는 애슬레틱스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바텀리는 1931년 시즌 초반 부상에 시달렸고, 콜린스에게 주전 자리를 완전히 내 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바텀리가 부상에서 회복되어 가던 시점에 콜린스가 부상을 당했고, 복귀한 바텀리는 맹타를 휘둘렀다. 그는 시즌 막판까지 타율 수위에 강력히 도전하였으나, 결국 3위에 그쳤다.

당시 타격왕에 오른 선수는 바텀리의 팀 동료 칙 헤이피였는데, 그의 타율은 소수점 아래 10번째 자리까지 계산했을 때 .3488888889였으며 2위였던 뉴욕 자이언츠의 빌 테리는 0.3486088380, 바텀리는 .3481675393이었다.

즉 타율 1위와 3위 기록 사이의 차이가 불과 0.0007213496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종전까지 1위와 3위 간의 가장 근소한 차이였던 1911년 NL의 0.0015572366보다 훨씬 적은 수치였다. 그러므로 이 해에 타격왕을 놓친 것은 바텀리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32년 바텀리는 .296의 타율과 11홈런, 48타점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고, 카디널스는 콜린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바텀리를 내보내는 문제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카디널스는 투수 오니 캐럴과 외야수 에스텔 크랩트리를 받는 조건으로 바텀리를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시켰다.

레즈에서 바텀리는 그다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새 팀에서 맞은 첫 시즌에 그는 리그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10위 이내에 랭크되기는 했으나 타율 부문에서 0.250에 그쳤으며, 이후에도 나아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레즈는 1935 시즌을 마친 뒤 바텀리를 AL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으로 보냈다. 바텀리는 최초로 AL에서 보낸 해인 1926년에는 주전으로 출장하며 3할에 육박하는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이듬해에는 주로 대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 시즌 중, 바텀리는 처음으로 팀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본래 브라운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인물은 바텀리의 카디널스 시절 동료였던 혼스비였으나, 팀이 바닥권에서 맴돌자 그가 경질당하고 바텀리가 플레잉 매니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브라운스의 전력은 매우 부실하였고, 바텀리도 21승 58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는 데에 그쳤다.

1937 시즌을 마친 뒤, 바텀리는 메이저 리그를 떠났다. 그는 1938년에 마이너 리그 중 하나인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한 뒤 야구계를 등지고 미주리 주에서 목장을 경영하였다.

그 후 그는 1957년에 컵스의 스카우트가 되어 다시 일선에 복귀했으며, 시즌 중 애팔래치안 리그에서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나 심장 마비 증세로 두 경기만 치르고 물러났다. 그는 2년 뒤 또다시 심장 마비를 겪었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1974년에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었다.

제임스 리로이 바텀리 (James Leroy Bottomley)

- 1900년 4월 23일 일리노이주 오글비에서 출생
- 1959년 12월 11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 좌투좌타
- 1922년~193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루수
- 1933년~1935년 신시내티 레즈 1루수
- 1936년~1937 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1루수
- 통산 성적 : 타율 .310, 2313안타, 219홈런, 1422 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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