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슬슬 망가지는 ‘명품 중앙은행’ EC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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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적잖은 전문가 사이에서 ‘명품 중앙은행’으로 꼽힌다. 시장주의 금융통화이론에 아주 가까운 구조여서다. 미국 리치먼드 연방준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로버트 헤첼은 평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제자들의 꿈이 ECB를 통해 대부분 실현됐다”고 말하곤 했다. 프리드먼은 “돈을 움직여 경기변동을 자극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주장한 이론가였다.

 실제 ECB는 1998년 출범할 때 오롯이 통화가치 안정(인플레이션 억제)에 집중하도록 설계됐다. 경제 성장이나 고용 촉진, 금융 시스템 안정은 ECB가 해서는 안 될 일이거나 부차적인 일이었다. 유로존 재무장관 모임인 유로그룹이 “ECB도 경제 성장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ECB 본부에 전달되지 못했다.

 또 ECB는 인치(人治)와는 거리가 먼 은행으로 만들어졌다. 인플레이션 타깃(물가안정목표)을 정해 놓고 물가가 억제 목표(연 2~3%)를 위협하거나 넘어서면 거의 자동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도록 돼 있다. 이는 총재가 누구든 작동하는 통화정책 메커니즘이다. 이른바 ‘시스템 또는 룰(기준)을 중시하는 중앙은행’인 셈이다.

 반면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인치에 가깝다는 평이 우세하다. 의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정책이 쉽게 바뀌는 구조여서다. 물가가 내부 억제 목표치를 넘어서도 기준금리 인상 여부는 의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당연히 의장은 미국인들의 심기나 백악관의 요구사항 등을 살필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09년 이후 ECB의 단정한 모습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회원국들이 2009년 11월 이후 차례차례 재정위기를 맞자 국채 매입에 나서야 했다. 금융전문지 유로머니는 “ECB의 국채 매입은 금융 시스템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편법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ECB 모습이 더 흐트러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국채 매입을 더욱 확대하라는 요구가 비등해지고 있어서다. 국채 매입(부채의 화폐화)은 프리드먼이 말한 ‘악마와의 키스’다. 국채 매입이 통화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미 리치먼드 연방준비은행의 헤첼은 좀 다른 의견을 밝혔다. 그는 올 8월 잭슨홀 연찬회에서 “ECB 설계자들이 너무 이상적인 모습을 기준으로 설정했다”며 “중앙은행은 때가 많이 묻을 수밖에 없는 기관”이라고 촌평했다. ECB의 애초 모습이 지켜지기 힘들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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