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영채’는 죽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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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계몽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곤 하는 이광수의 ‘무정’(1917)의 주인공은 ‘이형식’일까, ‘박영채’일까? 보통은 주변 사람들을 계도하고 각성시킨 지식인 ‘형식’을 이 소설의 중심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사실 처음에는 ‘영채’를 주인공으로 해 구상되었다고 한다(이광수, ‘다난한 반생(半生)의 도정’, 『조광』, 1936.5). 그런데 ‘무정’을 영채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형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파악하게 된다.

  어릴 적 고아 형식을 거둬주었던 박 진사는 딸 영채와 형식을 정혼시켰다. 그러다 박 진사가 모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영채와 형식은 헤어졌었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영채와 재회한 형식은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그녀가 기생이 된 것일까를 의심하며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기생이 되어 순결하지 않다면 영채가 아무리 정혼자이더라도 꺼림칙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망설이고 있던 중에 ‘사건’이 터졌다. 영채가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겁탈을 당한 것이다. 뒤늦게 겁탈 현장에 도착한 형식은 이미 ‘상황종료’ 되어버린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영채는 이 충격적인 ‘기습사건’을 겪고 난 뒤 유서 같은 편지를 형식에게 남기고 자살을 하기 위해 떠난다. 편지를 받은 형식은 그녀를 찾기 위해 뒤쫓아가지만 결국 그녀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그는 부유한 개화파 김 장로로부터 그의 딸 선형과 약혼한 뒤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는다. 형식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다.

 영채의 입장에서 볼 때 형식은 얼마나 의리 없고 무력하고 비겁한 남자인가? 그는 집안의 몰락 이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영채를 도와주지도 못했고, 위기에 처한 그녀를 보호해내지도 못했다. 그녀가 겁탈 사건 이후 자살을 하러 떠났을 때에도, 그는 그녀를 살리려 쫓아가기는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와선 금세 딴 여자와 약혼해버렸다. 어쩌면 형식은 영채가 사라져버려서 홀가분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안 가 영채는 형식의 그런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영채가 자신을 살려낸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나려는 길에, 미국 유학 길을 나선 형식과 선형 커플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 순간 영채는 깨달았다. 자신과 형식은 ‘과거의 인연’일 뿐이며, 형식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인 남자인지를.

 어쩌면 영채가 형식처럼 미덥지 못한 사람에 대해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채는 결국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엄청난 사건, 상처,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형식과 같은 남자 따윈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했다. 우리도,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