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치] 아이들의 스트레스로 쌓아 올린 세계 2위

중앙일보

입력

[박민수 박사의 ‘9988234’ 시크릿]

가정의학과 전문의
박민수 박사

아이러니하게도 소아비만클리닉인 본원을 찾는 아이들의 절반은 소아비만이 원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소아비만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고 그 속에 도사린 우울증과 불안증, 화병들이 아이들을 살찌운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적 불안정이 과도한 공부스트레스와 비교위주의 교육방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중학생들은 3시경이 되면 몇몇을 빼고는 모두 집으로 귀가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특별 과외나 학원 수업이 더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이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한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는 것이 흔한 핀란드 중학생의 일상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저녁 8-9시가 돼도 집에 올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중학생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더 심해져 자정 전에 집에 오면 다행이다. 최근에는 ‘자기주도 공부법’이라고 하여 스스로 하는 공부법을 가르치거나 교정하는 업체들이 많다. 몇몇 업체에 대해서는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한다. 내용이야 어땠든 그런 업체들은 아이들에게 더 많이 공부하라고 독려하며 공부가 인생을 모두 바꿔줄 것처럼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는 스트레스 대응능력이 조금이라도 남은 아이들 이야기이다. 조금이라도 이겨낼 능력이 있으니 공부법을 고쳐서라도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고, 또 부모가 옆에서 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반에서 20-30% 정도, 아니 그 이상의 아이들은 공부스트레스 때문에 공부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목격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앞에 수학문제를 푸는 선생님과 교실 뒤쪽에 누워 잠을 자거나 핸드폰으로 연신 딴 짓을 하는 아이들이 함께 촬영된 교육다큐멘터리였다. 의사 입장에서 저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들에게 심한 소외감이나 박탈감 심리가 생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한국 학생의 공부 스트레스는 세계적으로, 아니 인류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으나 어마어마한 공부스트레스에 짓눌려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가득한 곳이 우리나라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란 것이 공부를 방해하는 첫 번째 장애물이다. 적당하고 기분 좋은 스트레스는 능률을 높이는 좋은 자극제가 되겠지만,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는 심신의 문제를 일으키고 치명적인 질환까지 가져오는 무서운 대상이다. 심지어 과도한 스트레스는 뇌 발달을 막거나 뇌를 파괴해 치매까지 유발하는 최악의 대상이다.

글을 떼기도 전에 우리 아이들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감당하기 어려운 공부스트레스에 노출된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이상 이는 벗어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스트레스로 인해 자신이 가진 소중한 능력과 강점, 잠재성을 잃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방치해버리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최근 급증하는 게임중독이나 청소년의 비행, 탈선, 자살, 소아비만, 소아성조숙증 등은 모두 사회 안에 무섭게 도사리고 있는 공부스트레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동시에 공부우울증 역시 매우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다. 내가 만난 현아는 공부우울증 때문에 공부는 물론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근데 현아엄마가 본원을 찾아오면서 내세운 이유는 아이의 폭식과 요즘 들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몸집 때문에 아이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성적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서 살을 빼서 가벼운 몸으로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아를 살펴보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성적도 남들이 봤을 때는 잘한다고 하는 중상위권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부족함과 게으름을 항상 채찍질하고 자책한다. 일종의 폭식증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은 현아는 공부를 하지 않고 몇 시간 이상 지나면 극도의 우울증과 짜증 때문에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마치 그런 자기모멸감이나 자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싫고 머리에도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놓고 오늘도 공부를 하고 있다.

현아의 유일한 스트레스 풀이는 인스턴트 음식 섭취였는데 이것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바쁜 학원들을 옮겨 다니면서 현아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대상이 단맛으로 무장한 인스턴트 음식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아의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흔한 일이 아닐까 싶다. 한국은 핀란드를 근소한 차이로 쫓으며 항상 OECD 국가들 간의 학력평가시험에서 2위를 차지한다. 한국의 입시 관계자가 으쓱하며 우리가 핀란드를 근소하게 뒤쫓고 있다고 하자 OECD교육국의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 아니에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아이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니까요. 한국 학생들은 핀란드에 비해 공부에 대한 의욕이 낮아요. 그래도 성적은 좋죠. 왜일까요? 바로 경쟁 때문이죠."

그리고 그 경쟁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추락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다. 지금의 아슬아슬한 세계 2위는 아이들의 안타까운 스트레스가 만든 모래성인 것이다.

박민수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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