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째 키스 … 96경기 만에 저주 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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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영이 LPGA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우승 트로피에 입맞추고 있다. LPGA 데뷔 후 첫 우승을 기록한 그는 “이번 우승은 나의 인생과 미래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랜도 AP=연합뉴스]

박희영(24·하나금융그룹)이 ‘트로이 목마의 저주’를 풀었다. 새로운 시대도 열었다.

 박희영은 21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그랜드 사이프레스 골프장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CME그룹 타이틀홀더스에서 합계 9언더파로 우승했다. 한국계 선수의 LPGA 투어 101번째 우승이며 200승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 대회는 시즌 마지막 대회이기도 했다. 박희영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우승이다. 박희영은 아마추어 시절 최고의 선수로 꼽혔다. 국가대표 에이스였고 2004년엔 아마추어 자격으로 프로대회인 하이트컵에서 우승했다. 고교 3학년이던 2005년 프로로 전향해 최나연(24·SK텔레콤)을 제치고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신인왕이 됐다. 박희영은 장타를 쳤고, 선수들이 인정하는 가장 완벽한 스윙을 했다. 박희영은 당시 최고 주가를 올리던 미셸 위가 ‘목표’라고 했다.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듬해 신지애(23·미래에셋)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박희영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악재도 겹쳤다. PAVV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출전해 해저드에서 샷을 하기 전 풀을 건드렸는데 텔레비전 중계를 보던 시청자의 제보로 뒤늦게 알려져 실격 처리됐다.

 결정적인 사건은 2007년에 터졌다. KB국민은행 스타투어 2차 대회에서 박희영이 지은희(25)와 우승을 다툴 때다.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두 선수가 함께 연습그린에서 웨지샷 연습을 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웨지를 두고 왔다. 경기위원이 웨지 두 개를 모두 박희영 측에 건넸다. 박희영의 캐디는 지은희에게 웨지를 준다는 것을 깜빡하고 둘 다 가방에 넣었다. 지은희는 그린에서 웨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캐디가 “박희영의 캐디가 웨지 두 개를 백에 넣는 것을 봤다”고 했다. 박희영의 백에 규정(14개)보다 많은 15개의 클럽이 있는 것이 발견됐다. 규정보다 많은 채를 갖고 있으면 홀당 2벌타를 받는다. 웨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박희영은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1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그러나 2벌타를 받는 바람에 말 그대로 버디가 보기가 됐다. 박희영은 이후 버디 5개를 잡았으나 연장에 가서 지은희에게 졌다.

 웨지는 박희영의 멘털을 무너뜨린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했다. 박희영은 이전 경기에 이어 2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웨지 사건으로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듯 박희영은 이후 4년여 동안 우승을 하지 못했다. 2008년 박희영은 LPGA 투어에 진출했다. 박희영은 “항상 우승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으나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최나연, 신지애 등이 LPGA 정상을 다투는 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불운도 이어졌다. 지난해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캐나디언 오픈에 나가 뒤땅을 세게 치면서 팔꿈치와 손목을 다쳤다. 올해 8월 세이프웨이 클래식에서는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해 연장에 합류하지 못했다. 대림대 사회체육과 교수인 아버지 박형섭(50)씨는 우승이 확정된 후 “마음고생이 엄청났다. 빨리 우승하려고 공격적으로 경기하다 보니 점점 초조해지고 더 말린 것 같다”고 했다.

 LPGA 투어 96경기째 만에 우승한 박희영은 “그동안 네가 우승을 못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질문이 아주 많았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꿈이 이뤄졌다. 이번 우승은 나의 인생과 미래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주 멕시코 대회에 나가 테킬라를 사왔는데 그걸로 파티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우승상금은 50만 달러(약 5억7000만원)다. 올 시즌 상금 35만1781달러(약 4억원)보다 많다.

 한편 최나연은 6언더파로 공동 4위, 청야니(대만)는 2언더파로 미셸 위(22), 크리스티 커(미국)와 함께 공동 6위를 기록했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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