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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혐의 아로요, 야반도주 ‘공항 정치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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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목·가슴 보호대를 착용하고 휠체어에 탄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이 15일 밤 신병치료를 이유로 마닐라 공항을 통해 출국하려다 당국에 의해 제지당하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선거부정과 부패혐의를 받고 있는 아로요는 이날 출국금지 조치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냈지만, 필리핀 정부는 해외 도피 가능성이 있다며 출국금지 조치를 풀지 않았다. 작은 사진은 1년 전 모습. [마닐라 AFP=연합뉴스]

선거 부정과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글로리아 아로요(64) 전 필리핀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신병치료를 이유로 심야에 기습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당국에 의해 제지당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목·가슴 보호대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휠체어에 탄 채 공항에 등장했다. TV 방송카메라도 따라왔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15일 밤 마닐라 공항에서 심야의 정치 드라마가 펼쳐졌다”고 보도했다. 아로요가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정치쇼를 벌였다는 것이다.

 아로요 전 대통령은 이날 구급차를 타고 마닐라 공항에 도착, 휠체어로 갈아타고 남편 호세 미겔 아로요와 함께 출국장에 나타났다.

 아로요는 뼈 관련 질환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싱가포르를 거쳐 스페인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는 최근 수년간 척추 수술을 세 번 받았지만 정확한 병명은 밝히지 않고 있다.

 공항 출국장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정부의 출국금지 지시를 따를 뿐”이라며 그를 막아섰다. 그러자 아로요의 남편은 “비열하고 잔인한 조치”라고 비난한 뒤 아내를 다시 구급차에 태워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 사태는 지난달 말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 정부가 아로요와 그의 남편, 아로요 집권 시절(2001~2010년) 고위 관리 30여 명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시작됐다. 아키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선에서 ‘아로요 전 정권의 부정부패 척결’을 내걸고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검찰 수사의 칼날이 조여 오자 아로요 전 대통령은 질병치료를 위해서라며 출국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키노 정부는 아로요가 부패 혐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을 수 있다며 거절했다. 이에 아로요 측은 대법원에 출국금지 조치에 대한 위헌판결을 요청했다.

 대부분 아로요에 의해 임명된 대법관들은 15일 출금금지 조치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아로요가 아직 검찰에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출국 불허방침을 재확인, 공항에서 아로요의 출국을 제지했다. 레일라 드 리마 법무장관은 “아로요의 출국을 허용하면 필리핀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필리핀의사협회도 “아로요 전 대통령을 치료할 의사는 국내에도 많다”며 아키노 정부를 거들었다. 아키노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 국비로 해외 의료진을 데려오겠다”며 아로요를 비꼬았다.

 아로요는 2004년 대선에서 개표 부정을 저지르고, 선거에서 가톨릭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복권기금을 유용한 자금을 교회 관계자들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현목 기자

◆글로리아 아로요=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필리핀 대통령을 지냈다. 고(故)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9대 대통령(1961∼65년 재임)의 딸이다. 미국에서 유학한 경제전문가이며 86년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들어섰다. 92년 상원의원에 당선했으며 98년에 부통령이 됐다. 2001년 1월 부패 혐의로 사임한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나머지 임기를 승계,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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