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寅吃卯糧 공짜 점심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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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부와 중국 주부가 천당에 함께 갔다. 중국 주부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고생하고 저축만 하다가 이제 막 집 한 채를 샀는데 천당에 와 버렸다”는 푸념이었다. 그러자 미국 주부가 “나는 평생 좋은 집에서 지냈지만 한평생 빚만 갚다 보니 어느새 천당에 왔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중국에 회자(膾炙)되던 이야기다.
미국인처럼 돈을 미리 앞당겨 쓰는 것을 중국에서는 ‘인흘묘량(寅吃卯糧)’이라고 한다. 토끼해에 먹을 양식을 한 해 앞선 호랑이해에 미리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괸다는 상석하대(上石下臺)와 같은 말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미국의 국가부채에 대한 비아냥과 더불어 중국식 의로움(義)이 강조되기도 했다. 복숭아를 받으면 자두로 답례하듯 작은 은혜도 통 크게 보답한다는 투도보리(投桃報李)의 씀씀이가 경제 버팀목이라는 논리였다. 중국 관광객들의 해외 싹쓸이 쇼핑도 예의상 오고 가는 것을 중시하는 예상왕래(禮尙往來) 탓이라고 말했다.

다시 불거진 경제위기에 대해 대중(大衆)민주와 자본주의, 공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의 양대 모순 때문이라는 중국계 학자의 글도 있다. ‘자산계급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 미국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에서 한 말처럼 자본주의는 엘리트 민주로 시작됐다.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획득하면서 대중민주가 등장했다. 민주선거는 복지정책의 ‘경매장’이 됐다. 금융자본이 공업자본을 대체하면서 일자리는 줄고 중산층은 몰락했다. 파산한 중산층은 표를 무기로 복지를 늘리면서, 증세(增稅)를 어렵게 만들었다. 정부는 외국과 미래로부터 돈을 빌리는 인흘묘량식 적자재정으로 근근이 버텼다.

재정이 취약해진 정부는 자본도 국민도 만족시킬 수 없다. 사회의 자구(自救) 능력, 강력한 정치적 영웅의 등장만이 해법으로 남았다. 중국의 여성 문인 빙신(?心·1900~99)이 소설 조국을 떠나다(去國)에서 ‘영웅이 시대를 만들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英雄造時勢, 時勢造英雄)’라고 말한 대로다. 역사상 선거로 탄생한 정치 영웅에는 히틀러와 처칠, 정반대의 두 부류가 있었다. 2012년은 전 지구적인 선택의 해다. 한국도 그중 하나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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