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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가 다시 태어난 장아찌, 놀랍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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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셰프들이 지난 일주일 동안 한국을 경험했다. ‘제3회 서울 고메’ 행사를 맞아 한국을 찾은 이들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굴 까는 할머니를 신기해했고 회 뜨는 아저씨 옆에서 한참을 바라봤다. 요즘 한식세계화에 대한 말이 많다. 일주일 동안 이 세계적인 셰프들 곁에 착 붙어 다니며, 한식세계화를 물었다. 사진은 프랑스의 파스칼 바흐보, 벨기에의 상훈 드장브르, 스페인의 호안 로카(왼쪽부터).

유럽의 미슐랭 스타 셰프들이 한결같이 높이 평가한 것은 한국의 식재료였다. 그들은 장아찌는 물론이고 온갖 채소, 그리고 싱싱한 활어부터 한우까지 “큰 영감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스웨덴에서 온 프란첸(34)은 한국인을 위한 디너의 메뉴를 미리 정해서 왔다가한국 식재료를 맛보고 주방에서 한국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로 급하게 바꿨고, 스페인에서 온 로카(47)는 들깨가루·멸치가루·표고버섯가루 등 가루로 된 재료를 잔뜩 사가지고 돌아갔다.

글=이상은 기자
사진=서울고메조직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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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셰프들, 한국 식재료에 감탄

스페인에서 온 호안 로카 셰프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 잡는 도구를 직접 들어보이고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해 셰프들은 모두 자기 나라엔 활어를 파는 어시장이 없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스페인에서 온 로카는 “스페인 시장에선 헤엄도 치고 펄쩍 뛰어 오르기도 하는 살아 있는 생선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셰프들은 수산시장 상인들이 현장에서 재빠른 솜씨로 굴을 까서 판매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프란첸은 굴 껍데기를 까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스웨덴에선 매년 굴 까기 대회를 하는데 당신이 거기 나간다면 우승할 것”이라며 “할머니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미더덕도 다들 처음 보는 해산물이라며 신기해했다.

 설문조사 결과 공통으로 주목받은 식재료는 뜻밖에도 유자였다. 서양요리에 레몬이나 라임을 많이 쓰곤 하는데, 신맛이 나면서도 달콤한 맛이 강한 유자가 훌륭한 대체품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듯이 보였다.

 프랑스에서 온 바흐보(39)는 “2007년 우리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한국인 셰프에게 유자청을 선물 받고 나서 한국 유자가 레몬이나 라임 못지않게 우수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유자가 이토록 다양한 맛을 내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한우에 대한 평가도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프란첸은 “한우와 유자만큼은 꼭 스웨덴으로 수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창의적인 채소 요리가 주특기인 바흐보는 한국인들이 채소의 모든 부분을 먹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잎만 먹는 게 아니라 뿌리도 먹고, 꽃도 먹는 걸 보고서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을 탓했다.

# “김장아찌와 명이장아찌는 오묘한 맛”

전주한옥마을을 찾은 외국인 셰프들은 발효 음식 중에서도 장아찌에 특히 주목했다.
유자의 재발견. 이번 방문에서 그들은 한국 유자의 가치를 발견했다.

싱싱한 식재료 못지않게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발효음식이었다. 발효음식 중에서도 특히 장아찌(사진)는 피클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장아찌 만드는 법을 일일이 받아 적은 바흐보는 “날것이었던 채소를 긴 시간 동안 말리고 데치고 숙성시켜 장아찌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마치 채소에 제2의 삶을 부여한 것처럼 느껴진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장아찌 중에서 김장아찌와 명이장아찌를 오묘한 맛이라고 칭찬했으며, 다양한 젓갈류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장아찌가 한 종류가 아니라 지방에 따라 종류가 다른 것이 인상적이라는 답변도 많았다.

 된장·고추장 등 장류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한국 입양아인 상훈 드장브르(41)는 “평소 벨기에에서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익숙하다”고 답했지만, 한국의 장을 처음 접한 셰프가 더 많았다.

 프란첸은 “이전까지는 일본 된장만 접해봤고 지금 내 레스토랑에서도 일본 된장을 쓰고 있지만 한국 된장이 훨씬 더 맑은 맛이 난다는 걸 이번에 알고 무척 놀랐다”고 털어놨다. “작년부터 스페인의 내 레스토랑에서 한국 된장을 쓰고 있다”고 밝힌 로카는 대신 “나에게 놀라운 건 발효음식인 장을 사용해 다시 채소를 발효시켜 장아찌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식재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키워드는 식재료에 관한 관심이다. 이번에 방한한 셰프들 역시 식재료에 관한 날카롭고 까다로운 인식을 드러냈다.

 프란첸은 아예 자체 농장을 가지고 있어 채소는 물론 돼지나 닭까지 모두 직접 키워 쓴다고 소개했다. 생선을 공급받을 때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방법으로 죽인 생선만 공급받는다고 했다. 그는 “조리 과정을 여러 단계 거쳐 맛을 내는 것보다 최고의 재료를 최상의 상태에서 사용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란첸이 주장하는 이른바 즉석 요리(Immediate Kichen) 철학의 방식이다.

 바흐보는 일주일 중에서 4일만 식당 문을 열고 나머지 3일은 식재료를 찾아 돌아다닌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까지 세계 3대 진미라는 캐비아를 음식에서 쓴 적이 없다”며 “오히려 질 좋은 감자나 싱싱한 생선이 더 좋은 식재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상훈 드장브르는 “이번에 방한한 외국인 셰프들이 한국 식재료에 많이 놀란 것 같다”며 “이미 벨기에에서 한국 식재료를 사용 중인 나로서는 그들을 지켜보는 게 매우 흥미로웠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그는 이번 디너에서 분자요리로 재해석한 보쌈을 비롯해 천일염 캐러멜, 오미자 마카롱 등 한국 식재료를 활용한 과감한 메뉴를 선보였다.

스타 셰프들 “한식 세계화, 영문 표기·설명 표준화부터” 

한식 세계화에 관한 질문이 돌아오자 스타 셰프들은 최대한 예의를 표했다. 이를 테면 한식 자체에 관해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고 대답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으로 파고들어가자 예기치 못한 날카로운 지적이 마구 날아왔다.

 스페인의 로카는 “한식은 식재료는 물론이고 요리법까지 뛰어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금 더 창의적으로, 아예 장난을 치는 것처럼 파격적으로 나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주문했다. 이번 행사에서 한국인 셰프들이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로 음식을 대하는 모습이 눈에 걸린 모양이었다.

 스타 셰프들의 쓴소리가 가장 많이 몰린 곳은 한식을 알리는 방법이었다. 바흐보는 “독특한 채소 요리가 많지만 외국인을 위한 정확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식의 영문 표기법에 대해서도 지적 사항이 집중됐다. 이번 ‘서울 고메’에 초청된 한국계 미국인 셰프 주디 주(37·영국 ‘플레이보이 클럽 런던’ 오너 셰프)는 “김치만 해도 표기법이 열 개는 될 것”이라며 “영문 표기법부터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주디 주는 이어 “외국에서 삼성이나 현대를 일본 기업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유럽에서는 훌륭한 한식을 먹고서도 일식이나 중식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식이 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현실을 꾸짖었다.

 상훈 드장브르는 발효음식에 대해 “고추장은 감칠맛을 내는데 아주 좋지만 외국인에겐 너무 매울 수 있으니 적절한 맛을 찾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고, 프란첸은 “한국은 발효음식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우처럼 품질 좋은 식재료도 함께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주디 주 역시 “일본이 생선, 중국이 돼지고기로 특화돼 있는 것처럼 한국은 갈비나 불고기를 활용해 쇠고기라는 식재료를 특화하는 것도 유력한 방법일 것”이라고 충고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 한식세계화를 추진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프란첸은 “스웨덴과 스페인 정부도 자기네 국가의 음식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오랫동안 지원하고 투자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바흐보는 “한국 정부가 뉴욕 한식당을 추진하다 포기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한국 정부의 우선 순위가 잘못된 것 같다”며 “한식 영문법 표기나 자세한 영문 설명 등 표준화 작업이 당장 더 시급한 문제”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셰프들은 한식세계화 전략에 관해서도 조언을 했다. 로카는 “요즘 유럽에선 그동안 덜 알려졌던 다양한 국가의 음식이 인기”라며 “요즘 같은 분위기는 한국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알려줬다. 프란첸은 “전 세계 스타 셰프들은 항상 일본을 주시하고 있다”며 “한국도 일본이 어떻게 일식 세계화를 추진하는지, 요즘 일식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꼼꼼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라고 솔직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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