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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폭행 사건 후 2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의 홀로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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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2년 전 상처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천재 뮤지션 유진 박이 다시 한국 무대에 오른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힌 나라에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고 말투가 느릿느릿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날은 좀 달랐다. 자꾸 동문서답했고 계속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 어딘가 아픈 듯, 몸도 많이 무거워 보였다. 수월한 대화를 위해 소속사 관계자가 인터뷰에 동석해야 했다. 그의 새 매니저이자 소속사 대표인 엄덕영씨는 “조울증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틀 전에야 퇴원했는데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처음 보는 기자가 낯선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악수를 건넸지만 기자가 잡은 손에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기자가 인사를 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인터뷰 자체를 며칠 연기해야 될 듯 보였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꺼내자 반전이 시작됐다. 그의 손은 놀라울 만큼 빨랐고 눈도 누구보다 반짝였다.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어 보였는데 리듬을 타면서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런 얘기, 이제 하지 마…

유진 박은 지난 2009년, 전 소속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슈가 됐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유포돼 의혹이 커졌고, 동네 경로당 잔치 등 온갖 행사에 동원되면서 최소한의 활동비도 받지 못한다는 소문이 불거졌다. 숙소에 감금된 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의혹이었다. 실제로 유진 박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겨울, 8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픈 기억을 전부 묻은 걸까. ‘그때 그 일’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언급을 피한 채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만 말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팬들이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제 얼굴을 본뜬 인형이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만들어 선물해 주고, 내 연주를 다시 듣고 싶다는 편지도 보냈죠. 그게 힘이 돼서 다시 한국 팬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이왕이면 한국에서 유명해지고 싶고, 인기와 돈도 얻고 싶거든요(웃음). 이제는 제대로 된 콘서트장에서 연주다운 연주를 하고 싶어요.”

미국으로 돌아간 후 8개월 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로서는 모처럼의 휴식이었다. 고향 마을 근처의 작은 공연장에서 틈틈이 연주를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기자들 앞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 먹고 살 많이 쪘다”며 웃어 보이던 그였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씻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유진 박은 이날도 “나 얼굴도 맞고 그랬어. 피도 나고 힘들었어”라고 말하더니 “그런 얘기 이제 하지 마” 하고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한국말이 서툴러 존댓말을 할 줄 모른다). 그의 매니저도 “예전 소속사 일을 여러 번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언급을 피했다”고 했다.

현 소속사 측에서는 유진 박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기 전, 폭행설이나 임금체불 주장 등에 관해 전 소속사와 법적으로 얽힌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봤는데 전부 유야무야 마무리된 상황이라고 했다.

유진 박은 오랫동안 조울증에 시달려왔다. 감정 기복이 빨리빨리 변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한번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면 한 달 이상 그런 증세가 계속된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컨디션이 좋았다. SBS ‘스타킹‘에 출연해 기타리스트 김세황과 함께 연주했고 앨범 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기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8월 말, 또 한 번 컨디션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번에는 증세가 심했다. 이제 컨디션이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지만 한 주제로 차분히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려웠다. 단, 음악 얘기라면 가능했다.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 얘기하는데 전부 연주나 노래와 관련된 것이었다.

“기분 좋아요. 내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모습이 케이블 TV에 나갔는데 그때 이런 얘기를 했어요. 한국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이 너무 좋고, 음악이 좋고, 제대로 된 공연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요즘은 힙합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해요. 한국 힙합도 괜찮고, 윤미래씨도 좋아요. 이효리도 좋고(웃음).”

순진한 어른, 홀로서기를 배우다

그의 한국행을 도운 건 팬들이었다. 2년 전 감금, 폭행설이 제기됐을 때 포털사이트에 ‘유진 박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연합’ 모임이 개설됐다. 그의 오래된 팬과 음악애호가들이 모여 있는 이 동호회에서, 회원들은 ‘유진 박 부활, 재기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새로운 소속사를 연결해 준 사람도 팬들이었다. 클래식과 퓨전 국악 밴드 등을 육성하는 음악 회사에 직접 찾아가 유진 박의 영입을 요청한 것.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그는 천재지만 세상일에 굉장히 서툴다. 운전면허증도 없고, 지갑과 휴대전화도 없다. 늘 누군가 옆에서 챙겨줘야 한다. 지하철을 혼자 타본 적도 가게에서 혼자 뭘 사먹거나 밥을 챙겨 먹어본 적도 없었다. 워낙 어려서부터 방에 틀어박혀 연주만 하며 고립(?)된 채 생활한 탓이다.

천재 뮤지션은 그렇게 세상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인터뷰에 동석한 엄 대표도 “늘 꽉 짜여진 관리 아래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혼자서 뭘 잘 못한다”고 귀띔했다. 음악 외에는 별다른 욕심도 없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데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 혹자들은 그를 천재가 아니라 ‘바보’라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런 성향을 두고, 어릴 적 그의 어머니가 보여줬던 과도한 교육열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다. 어머니 박장주 여사는 하루에 10시간 넘게 바이올린 연습을 시키는 등 열성적인 교육과 관리로 유명했는데 그게 오히려 아들을 울타리 안에 가뒀다는 견해다. 최근까지도 그의 공연 일정 등 외부 활동에는 늘 어머니가 깊이 관여했고 유진 박의 돈도 전부 미국에 사는 어머니가 관리한다.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천재성을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인으로서 현실적인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여러 의미에서 ‘독립’을 생각해 볼 시점이라는 얘기.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유진 박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속사 관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도 그때그때 생각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홀로서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요즘은 가끔 헬스클럽에 혼자 가고 아침밥도 직접 챙겨 먹는다. 숙소 건물 1층에 있는 마트에도 다녀온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과지만 지금까지 그에게는 없던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을 만나거나 관계를 맺는 경우가 드물다.

그의 조울증 치료를 담당한 주치의가 “사회적인 관계 맺기에 적극 힘써보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하지만 같은 소속사 뮤지션들과 가끔 저녁을 먹을 뿐, 새로 친구들을 사귀는 경우는 없다.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해서다. 소속사 관계자가 들려준 하루 일과를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루 종일 인터넷상에서 옛날 영상을 검색해요. 20대 때의 공연 영상을 찾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화면이 나오면 다른 사람을 보여주면서 ‘이것 보라’며 자랑을 해요. 그러다 CD로 로큰롤 같은 신나는 음악을 듣고 TV는 ‘Mnet’ 같은 음악 방송을 보죠. 디제잉에도 관심이 많고요. 그렇게 음악에 묻혀 지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이 방문하면 한국말을 배워요.”

결혼 적령기이고 스스로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려워해서 그의 주변에는 소개팅을 주선하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워낙 세상 물정에 어둡고 혼자가 익숙해 제대로 된 만남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연애 얘기가 나오자 유진 박이 갑자기 “나는 파워 있는 여자가 좋다”며 환히 웃었다. 무슨 힘이냐고 물어봤더니 대답 대신 “고민 고민 하지 마~” 하면서 이효리의 ‘유고걸’을 불렀다. 음악 얘기를 빼고 그와 대화하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 보였다.

춤추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본질

그는 천재다. 3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13세 때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20세에 줄리어드 음대를 조기 졸업했다. 클래식 연주만 하는 줄 알았던 바이올린으로 로큰롤과 재즈, 테크노 음악을 연주한 예술계의 이단아였다. 뛰어난 연주 실력에 폭발적인 무대 매너를 갖춘 1세대 크로스오버 뮤지션. 한국무대에 데뷔했을 때 선풍적인 인기는 당연했다.

그는 ‘춤추는 바이올리니스트’다. 1990년대 후반 국내에 첫선을 보였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곤 했다. 그 굉장했던 몰입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로커가 되고 싶어요. 내가 원래 1970~80년대 로큰롤과 재즈, 오래된 록 그룹을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다 보면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음악에 빠져들어요. 밴드 멤버들이랑 약속한 음이 있는데 제가 애드리브를 해요. 즉흥적으로. 멤버들이 그 연주에 맞추느라 고생을 하지만, 한번 빠지면 어쩔 수 없어요. 전자 바이올린은 가격이 좀 싸서 흥분하면 던지기도 하고(웃음).”

바이올린을 잡으니 10여 년 전 TV에서 봤던 그 모습이 바로 나왔다. 손놀림은 놀랄 만큼 정교했고 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멜로디는 어떤 행진곡보다 빠르고 경쾌했다. 눈을 질끈 감고, 때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곡을 끝까지 연주하는 동안, 현장에 있던 스태프 중 누구도 그의 연주를 끊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 박은 연주를 끝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면서 나를 보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예전에는 어디서 공연해도 긴장을 안 했는데 요즘은 듣는 사람이 있으면 자꾸 떨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실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일리 있는 평가다. 그동안 정식 무대가 아닌 조그만 행사장에서 자주 노래하다 보니 녹음된 반주에 맞춰 기계적으로 연주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연주를 들은 음악인들은 “테크닉은 많이 남아 있는데 특유의 ‘소울’이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치료를 받느라 건강도 많이 나빠졌고 한때 살이 20kg넘게 찌면서 슬럼프가 길어졌다. 지난해 초, KBS ‘인간극장’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뚱뚱해진 그의 모습을 본 팬들이 ‘천재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아쉬워하던 즈음이었다.

팬들과 새 소속사가 ‘부활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석 달 가까이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쉬게 했다.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면서 몸도 만들었다. 그렇게 지친 심신을 가다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3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잡은 후 30여 년 만에 처음 맞는 휴식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기억하던 왕년의 ‘춤추는 바이올린’ 실력이 나왔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부활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최근 미니 앨범을 냈고 10월 29일부터 이틀 동안 모처럼만의 콘서트를 열었다. 대학로의 작은 공연장이지만 그가 직접 만든 노래들을 들려주는 의미 있는 자리다.

새 앨범에 실리는 노래 중에는 그가 직접 작곡한 곡이 많다. 어떤 감정이 담겼는지 궁금했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쓸쓸한 느낌이 풍긴다. ‘Looking for girlfriend’라는 제목의, 여자 친구를 찾는 노래도 있다. 외로움이 많았느냐고 물으니 그냥 씨익 웃는다. 소속사 대표가 대신 입을 열었다.

“유진 박은 아프거나 힘들어도 말로는 표현을 잘 안 해요. 저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더라고요. 자기 감정을 연주로 드러내는 데 더 익숙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 곡들을 보면 뭔가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빨리 좋은 일이 생겨야 될 텐데(웃음).”

새 콘서트의 이름은 ‘부활’이다. “유진 박은 무엇으로부터 부활하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다물었고, 이번에도 소속사 대표가 옆에서 거들었다. 공연의 부제가 ‘노스탤지어’라는 설명.

“과거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어요. 이 친구는 지금 자기 인기가 예전에 비해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냉정하게 느끼고 있어요. 누가 자기를 알아봐주기만 해도 그것 자체에 크게 감동합니다. 유진 박은 예술가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음악을 많은 사람이 들어주길 바라는 뮤지션이거든요. 세계적인 천재로 주목받으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 시절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유진 박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미사여구 없는 담백한 단어로, 그는 ‘잘하고 싶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조금 힘들었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해 범인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는 본질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그 본질은 간단하지만 어려웠다.
“나를 보면 걱정들이 많잖아. 나도 알아, 내가 그렇게 보인다는 걸. 하지만 앞으로는 잘하고 싶어.”

취재_이한 기자 사진_하지영(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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