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조원 빚 이탈리아 … ‘불사조’ 베를루스코니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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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8일(현지시간) 로마 대통령궁에서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을 만나 사임 의사를 밝힌 뒤 궁을 떠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경제개혁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물러날 예정이다. 그는 사임 이유를 “시장에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로마 AP=연합뉴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75) 이탈리아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 베를루스코니는 8일(현지시간) “(금융)시장에 우리(이탈리아)가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총리가 경제개혁 관련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대로 사퇴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관련 법안들은 10∼15일 뒤쯤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총리가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야당도 통과에 반대하지 않을 전망이다. 그의 퇴장 결심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숱한 스캔들, 야당의 압박, 국민의 퇴진 요구 시위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베를루스코니를 굴복시킨 것은 그가 언급한 ‘시장’이었다. 9일 금융시장에서 이탈리아 국채 수익률은 7%를 웃돌았다. 이 수준이 계속 유지되면 국가 부담이 너무 커져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석 달 동안 무디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피치 등 주요 신용평가 회사들이 줄줄이 이탈리아의 국가 신용등급과 주요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강등시켰다.

경제 전문가들은 “총리 자체가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해 왔다. 경제위기에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는 그가 문제의 근원 중 하나라는 진단이었다. 의회에서 불신임 투표를 51차례나 당하고도 정치력으로 살아남은 그가 시장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날 의회에서도 결정타를 맞았다. 예산 승인 표결에서 찬성표가 재적의원(630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8표만 나왔다. 야당이 대거 표결에 불참하는 바람에 출석의원 수가 적어 승인안은 통과됐지만 그가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의회 과반 의석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최근 집권당인 자유국민당 의원들마저 그에게 반기를 들며 속속 탈당했다.

1994∼95년, 2001∼2006년 총리를 지낸 베를루스코니는 2008년 다시 총리에 올라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왔다. 최근에는 20%대로 내려앉았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지율은 60%를 웃돌았다. 밀라노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건설업으로 자수성가했다. 방송사·신문사·보험사·극장·프로축구 구단 등을 보유한 이탈리아 3위의 부자다. 재산은 90억 달러(약 10조원)에 이른다. 그는 닷새 전 프랑스 칸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총리직 수행을 계속해야 하는 의무감이 있다. 이는 내게 엄청난 희생이다. 나 대신 이탈리아를 이끌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성년자 성매수, 횡령, 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탈세 등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최근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성매수 혐의에서는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죄판결로 수감될 가능성도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사퇴 계획을 밝힘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거국내각 설립 또는 조기 총선을 통한 새 정부 구성 등의 수습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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