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105> 고통의 유통기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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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풍경1: 자식의 주검을 안고서 여인이 절규했습니다. “부처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붓다는 여인에게 말했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아서 겨자씨 세 개를 얻어오너라. 그럼 네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 여인은 마을을 다 뒤졌습니다. “혹시 이 집에 사람이 죽은 적이 있습니까” “여보세요. 이 근처에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습니까?” 결국 여인은 그런 집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죠. 그러나 ‘나의 일’로 닥칠 때는 우리도 그 이치를 못 보게 됩니다. 여인은 결국 자식의 죽음을 수용했습니다.

 #풍경2: 몇 달 전 신문에서 소설가 한강씨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주고 받는 문답이 눈길을 끌었죠. “인간의 고통에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그러자 한씨가 답했습니다. “음…, 어떤 고통은 유통기한이 없지 않을까요?” 기자는 “고통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므로 유통기한이 있다”고 주장했고, 소설가는 “고통의 소멸이 회복이라면, 완전한 회복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합씩 주고 받다가 마무리를 지었죠. 기자는 “그러므로 작가가 옳았다. 어떤 고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회복의 시점 또한 정해진 게 없다”고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현문우답’은 이 기사를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왜냐고요.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가 ‘상처와 치유’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회복, 상처와 치유. 달리 무엇을 위해 종교가 존재하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숱한 사람이 던졌을 물음입니다. “인간의 고통에 유통기한이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게에서 파는 과자나 주스처럼 인간의 고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보세요. 어떤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시나요. 실은 ‘풍경1’이 이미 이 물음에 답을 했습니다. 만약 여인이 붓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자식 잃은 고통은 영원히 지속됐을 겁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하겠죠. “자식 잃은 고통은 유통기한이 없다.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니 고통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가을 낙엽이 거리를 덮고 있습니다. 계절은 그렇게 가고 옵니다. 자연의 이치죠. 왜 그럴까요. 여름의 속성, 가을의 속성이 본래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변하는 겁니다. 엊그제의 가을과 어제의 가을이 다르고, 어제의 가을과 오늘의 가을이 또 다르듯이 말입니다. 감정도 계절과 같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죠. 왜 그럴까요. 감정의 속성도 본래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엊그제의 고통과 어제의 고통이 다르고, 어제의 고통과 오늘의 고통이 다른 겁니다. 그렇게 고통은 사그라지는 거죠.

 때론 사라지지 않는 고통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고통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고통의 대상’을 놓고 싶지 않은 겁니다. 가을이 가고, 이미 겨울이 왔는데도 내 마음은 ‘낙엽 지는 가을’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거죠. 창 밖에 흰 눈이 펑펑 내려도, 그 사람에겐 여전히 가을이 계속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의 유통기한은 끝이 없다. 따라서 고통의 유통기한도 끝이 없다. 이 가을이 끝나고, 진짜 겨울이 온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니 ‘1년짜리 고통’이 있는 게 아닙니다. ‘1년짜리 고집’이 있는 거죠. ‘10년짜리 고통’이 있는 게 아닙니다. ‘10년짜리 고집’이 있을 뿐입니다. ‘평생 가는 고통, 영원한 고통’도 없습니다. ‘평생 가는 고집, 영원한 고집’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쥐는 힘과 펴는 힘이죠. 세게 움켜쥐는 것도 내 마음의 힘이고, 활짝 펴는 것도 내 마음의 힘이죠. 그래서 우리는 양쪽 다 쓸 수가 있습니다. 둘 다 나의 힘이니까요. 다만 사람들이 ‘펴기’보다 ‘쥐기’에 익숙할 뿐이죠. 그러니 나의 고통에 유통기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만큼 더 쥐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바로 집착의 강도입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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