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변호사 “FTA 땐 미국 식민지” …인천 여고생 “맹장수술비 900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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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비준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5일 저녁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지난 3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평소 500여 명이 참여하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에 2000명 (경찰 추산)이 몰렸다. 그동안의 집회가 좌파 단체 중심의 선전전에 가까웠다면 이날부터는 학생·주부 등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석한 ‘촛불 문화제’ 형태를 띠었다.

 양천구에 산다는 30대 주부 오모씨가 발언대에 올랐다. “(한·미 FTA로) 의료 민영화가 되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아기 예방접종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인천에서 왔다는 여고생도 “의료 민영화되고 나서 맹장수술을 받으면 900만원(현행 건보 적용 땐 환자 부담금 30만~160만원)이라고 하는데 그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느냐”며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모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한·미 FTA 관련 정보를 접하고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했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의 권영국(48) 변호사도 등장해 “미국과의 FTA는 경제 협정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는,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드는 너무나 위험한 협정”이 라고 말했다.

인터넷 카페 ‘소울드레서’ 등 세 곳이 함께 만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인터넷 선전물. “맹장 수술비 900만원! 감기약10만원!” 등 개방 대상에서 빠진 분야에 대해서도 가격 폭등설을 제기하고 있다.

 현장에 있던 경찰 관계자는 “‘감기약이 10만원 될 것이다’라는 등의 황당한 말들이 SNS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료 민영화는 이번 FTA 협상에서 제외됐다. 고려대 이재형 교수(국제법)는 “의료 민영화는 FTA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맹장 수술비가 900만원으로 뛴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접한 뒤 집회에 참가하고, 그걸 본 다른 시민들이 집회에 가세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나라당이 “10일 비준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이번 주가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통과되면 우리나라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처음 보고 잠을 못 잤다.”(인천 여고생)

 “선생님이 그러는데 미국에선 의사가 손가락 두 개가 잘리면 ‘둘 중에 어느 손가락을 붙이겠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나는 두 손가락을 다 붙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안산 여고생)

 지난 3일 이후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선 사실과 다른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FTA 통과 후) 감기에 걸리면 한 달치 월급이 날아가고, 맹장수술 하면 차와 집이 날아가고, 암에 걸리면 하늘나라로 날아가게 된다”는 식이다.

 고려대 학생 김지윤씨는 “한·미 FTA 조항을 뜯어보면 팔아치울 수 있는 건 뭐든지 팔아치우겠다는 걸로 가득하다”며 “이걸로 이익 얻는 자들은 탐욕스러운 1%와 그 1%를 대변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한·미 FTA는 흡혈귀 같은 존재”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들은 자신들이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5살 은광이 엄마’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우리는 FTA 관련 정보를 다 알아나가고 있다. 아이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게 얼마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그 많은 법을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 우리 투쟁의 역사인데 그것을 다시 바꿔버릴 수 있는 게 한·미 FTA”라고 말했다.

 음모론과 정치 선동도 나오고 있다. 인천 Y고교에서 온 학생은 “어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FTA에 관한 게 하나도 없더라”며 “왜 (정부가) 포털 사이트에 압력을 넣어서 막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우 맹봉학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했던 배우 맹봉학(48)씨는 “2008년 광우병 시위에 나왔던 학생들이 ‘시민의 (서울)시장’을 당선시켰다”며 “여기 모인 촛불이 내년 총선·대선까지 갈 수 있는 촛불이길 원한다”고 말했다.

천정배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한·미 FTA는 우리의 주권, 공공정책권을 다 미국 자본에 넘겨주는 것”이라며 “이번 투쟁은 매국이냐 부국이냐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최소한 왜곡된 정보는 시정돼야”=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은 “의료보험, 영리병원 등 보건의료 서비스는 협정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2008년 광우병 시위 때도 초반에는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다 끝에 가선 불법 폭력시위로 변질됐다”며 “이번에도 좌파 단체에서 ‘AGAIN 2008, 여의도 촛불 점화’ 등의 방법으로 선동 중이나 광우병 시위 때와 달리 한·미 FTA는 국민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어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집회를 제외하곤 2000년대 들어 대규모 군중집회가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등 모두 반미 기조를 띠는 것도 우려되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사회학)는 “2008년 광우병 시위와 현재 FTA 반대 집회의 주장이 객관적이지 않지만 설득력을 얻는 것은 현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사회학)는 “트위터의 경우 간단한 정보를 쓰다 보니 일반적인 토론보다 센세이셔널한 정보가 오가는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 공론의 장에서 합리적·이성적인 토론이 많이 이뤄져 정확한 정보가 유통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우병 시위=정부가 미국과 2008년 쇠고기 수입 협상을 마무리하자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수입한다’며 시민단체가 벌인 시위다. 5월 초부터 7월까지 수십만 명이 참여해 촛불시위를 벌였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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