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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왕과 나 등 숱한 걸작 … ‘미국 뮤지컬’ 시대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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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호 28면

‘캐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은 유명한 뮤지컬이다. 노래와 춤 그리고 드라마를 조합한 뮤지컬은 19세기 말 영국에 처음 등장했다. 영국은 고전음악에 관한 한 유럽 대륙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탈리아·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엔 오페라가 있었다. 반면에 영국은 정치·경제적으로 강국이었지만 오페라의 전통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이 유럽 오페레타를 본떠 대중 오락물로 만든 게 뮤지컬이다. 1892년 최초의 뮤지컬이 런던에서 공연됐다. 뮤지컬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도 클래식 음악의 뿌리가 없다는 점에서 영국과 사정이 비슷했다. 그래서 뮤지컬은 미국에서도 빠르게 자리 잡았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뮤지컬 대중화 이끈 리처드 로저스

정통음악 배워 작품 경향 클래식풍
1965년에 나온 ‘사운드 오브 뮤직’은 우리에게 친숙한 뮤지컬 영화다. 조국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주인공 폰 트라프(캐나다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 연기) 대령은 가족과 함께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한다. 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기 직전 기타를 치며 부인 마리아(영국 배우 줄리 앤드루스 연기) 그리고 자녀 모두와 함께 부른 노래가 있다. 슬로왈츠풍의 2부 합창곡 ‘에델바이스’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이 뮤지컬에 나온 ‘도-레-미 송’도 싱어 롱 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원래 뮤지컬로 세상에 나왔다. 이 작품 외에도 많은 주옥 같은 뮤지컬을 만든 미국 유대인 작곡가가 있다. 리처드 로저스다. 그는 동료 유대인 작사가 로렌츠 하트 그리고 오스카 해머슈타인 2세와 함께 약 30년간 미국 뮤지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로저스는 평생 900여 곡의 대중음악과 43개의 뮤지컬 그리고 2개의 영화 주제곡을 작곡했다. 그는 에미·그래미·오스카·토니·퓰리처 등 5개의 문화·예술 대상을 휩쓸었다. 음악인으론 최초다. 유대인 작곡가 마빈 햄리시(영화 ‘스팅’ 주제곡, 뮤지컬 ‘코러스라인’ 작곡)가 로저스에 이어 두 번째로 다섯 개의 상을 모두 수상했다.

로저스는 1902년 뉴욕 퀸스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대인이다. 원래 성은 에이브러험스였지만 아버지 대에 영어식 성인 로저스로 바꾸었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고교 시절 첫 곡을 작곡했다. 줄리아드 음악학교의 전신인 음악예술연구원을 다닌 후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평생 동지인 폴란드계 유대인 로렌츠 하트와 독일계 유대인 오스카 해머슈타인 2세를 만난다. 이들은 후일 로저스 작곡 음악의 작사를 담당했다. 로저스는 미국 대중음악의 시조 격인 어빙 벌린(‘화이트 크리스마스’ 작곡)과 제럼 컨(‘그대 눈가에 스며드는 담배 연기’ 작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동유럽 태생의 유대인이다.

정통 고전음악 교육을 받은 로저스는 그의 곡에 재즈나 경음악풍을 섞지 않았다. 대체로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작·편곡을 했다. 세미클래식곡풍이다. 로저스와 하트 콤비가 28년 만든 곡 ‘블루 문’은 무려 25명의 가수에 의해 불려졌다. 30년대 초 미국 대공황기에 나온 ‘마이 퍼니 밸런타인’도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은 로저스의 히트곡 중 하나다. 로저스의 곡은 당대 유명 가수인 앨 욜슨, 빙 크로스비, 로즈메리 클루니 등이 불렀다.

로저스는 40년대 초부터 뮤지컬에 매달렸다. 그는 뮤지컬의 핵심은 음악이므로 음악이 뮤지컬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43년 하트가 세상을 떠나자 오스카 해머슈타인 2세와 새로운 콤비를 이룬다. 로저스는 43년 그의 첫 뮤지컬 ‘오클라호마’ 그리고 45년 ‘회전목마’를 발표한다. 49년엔 ‘남태평양’을 무대에 올리고 이 뮤지컬로 퓰리처상을 받는다. 이어 51년 ‘왕과 나’, 57년 ‘신데렐라’, 58년 ‘플라워 드럼 송’, 59년 ‘사운드 오브 뮤직’ 등 불후의 뮤지컬을 속속 내놓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무려 1442회의 무대 공연을 기록했다. 52~53년 방영된 TV 시리즈 ‘바다의 승리’ 주제곡도 작곡했다. 60년 해머슈타인 2세가 병사하자 로저스의 작곡 활동은 줄어들었다. 로저스도 79년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90년 뉴욕 46번가의 한 뮤지컬 공연장이 ‘리처드 로저스 극장’으로 명명됐다. 2002년엔 로저스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의 하나로 그의 첫 뮤지컬 오클라호마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다시 올려졌다.

로저스 사후, 미국 뮤지컬 사양길
로저스가 세상을 떠난 후 미국 뮤지컬은 사양기를 맞는다. 스티븐 손드하임과 제리 보크와 같은 유대인 뮤지컬 작곡가들이 로저스의 대를 이었지만 미국 뮤지컬은 이미 대중의 사랑에서 멀어졌다. 대신 뮤지컬은 영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영국인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작사가 팀 라이스와 콤비로 뮤지컬을 중흥시켰다. 로이드 웨버는 로저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뮤지컬 남태평양에 나오는 ‘어느 황홀한 저녁(Some Enchanted Evening)’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로저스는 품위 있고 재미도 있는 새로운 대중음악 모델인 뮤지컬을 확산시킨 공로자다. 미국 포브스지는 ‘사후에도 창작물로 수입을 올리는 인물’ 중 로저스를 10위에 선정했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매년 평균 800만 달러(약 89억원)의 저작권료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토종 뮤지컬 몇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공연을 한다. 그런데 우리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하려면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시대는 물론 달라졌지만 기본 음악이론에 충실했던 리처드 로저스의 뮤지컬을 다시 잘 살펴보면 좋은 해답이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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