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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어부는 망했고 나는 붉은 여왕과 함께 달린다 … 어디 가는지 알고 달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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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며칠 전 서울 수서경찰서에 절도 혐의로 구속된 일흔세 살 김모씨는 생각할수록 대단한 노인네다. 그 연세에 아파트 외벽 가스배관을 목장갑 하나만 낀 손으로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2층은 물론 5, 6층까지 침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술·담배를 전혀 안 하고 등산을 즐겼다. 경찰이 권하는 커피도 “몸에 안 좋다”며 거절했다. 방향이 안 좋아서 문제지만, 김씨는 한국인의 전형(典型)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철저한 프로의식과 자기관리,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일에 대한 열정 말이다. 시니어패스로 지하철을 공짜로 이용하면서도 후학(?)들이 엄두 못 내는 사업을 생각해 낸 도전정신 말이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노동윤리의 몰락에 대한 일화’라는 작품에서 묘사한 노인 어부는 대한민국 김씨와 대조적이다. 일찌감치 고기잡이를 다녀온 뒤 선창가에서 졸고 있는 노인에게 도시에서 온 관광객이 묻는다. 왜 고기를 더 잡지 않느냐, 더 많이 잡으면 어선도 늘리고 냉동창고·훈제공장을 마련해 큰돈을 벌 텐데. 어부가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오?”라고 묻는다. 관광객은 “이 항구에 편히 앉아 햇빛을 즐기고 바다를 보며 꾸벅꾸벅 졸 수도 있다”고 답한다. 어부는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다. 당신이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로 나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관광객은 가난한 어부에게서 거꾸로 동정심 아닌 부러움을 느낀다.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그리스를 보면 어부는 아마도 그리스인일 듯하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말한 ‘통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피가 어부 속에도 흐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휴식을 ‘신들에게 가까이 가는 최고의 행위’라고 봤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인들은 빚으로 휴식을 즐기다 망했다. 신에게 너무 가까이 가려고 욕심 낸 탓일까.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파트너는 ‘붉은 여왕’이다. 그리스 어부처럼 살다가는 한순간에 훅 간다는 것을 대부분 잘 알고 있다. 붉은 여왕은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온다. 항상 달려야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멈추면 처지고, 앞서려면 남보다 두세 배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외신들은 요즘 그리스 부도 위기와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을 대비시키지만, 그게 꼭 칭찬만일지 나는 의심스럽다.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근로시간과 자살률이 1위다.

 요즘 한국에서도 그리스 어부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동의하기 힘들다. 누군가의 말대로 ‘경쟁은 잠을 자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붉은 여왕과 함께 달리자니 딱하다. 최소한 방향이나 제대로 알고 달려야 할 것 같다. 주변 경치도 음미하면서 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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