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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 이야기-제 1회 응씨배 결승전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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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한국 바둑이 세계의 왕좌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기적’이란 두 글자 외엔 설명이 안 된다. 기반도 없었고 실력도 없었다. 국력도 약했다. 반면 일본은 하늘 같은 고수였고 빛나는 역사와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일본이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자 한국은 더욱 외톨이가 됐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대만의 잉창치가 세계대회 창설을 주창하면서 세계 바둑은 급속히 ‘실력대결’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고 한국의 조훈현 9단을 필두로 한 변방의 고수들도 청운의 꿈을 품고 대결에 나섰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후지쓰배, 바둑사의 새 장을 열다

1988년 당시 응씨배 우승상금 40만 달러는 그해 US오픈 골프대회 상금(18만 달러)의 두 배도 넘었다. 눈물겨운 투혼으로 4강에 오른 조훈현 9단(오른쪽)의 상대는 일본의 전설적인 강자 린하이펑 9단. 조훈현의 빠른 창과 린하이펑의 이중허리가 첨예하게 맞선 준결승전이 88년 11월 서울에서 열렸다. 무려 700여 명의 팬이 이 대국을 보기 위해 롯데호텔로 몰려들었다. [한국기원 제공]

세계 강자들이 ‘진검승부’로 맞붙는 실력대결의 시대가 1988년 시작됐다 88년 4월 2일 도쿄의 일본기원에서 요미우리신문사가 주최하는 후지쓰배 쟁탈 제1회 세계프로바둑선수권전이 열린 것이다. 일본기원은 몇 차례 불탔으나 그때마다 사회 각계 유력 인사들이 돈을 모아 건립해줬다. 400년 전 조선침략의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일본 최초의 전국대회를 열어 바둑 기사들에게 상금을 줬다. 도쿠가와 막부는 ‘전문기사’라는 직업을 만들어 나라의 녹봉을 주었고 그 총수에게 명인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본인방가(本人坊家) 등 네 가문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수백 년간 바둑을 발전시켰다. 총리가 일본기원 이사인 적도 있었다. 쟁쟁한 역사, 쟁쟁한 인물들과 더불어 바둑은 일본 국민의 자존심이 됐다.(※일본기원 명예의 전당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대 본인방 산샤, 초기 일본바둑의 이론을 정립한 본인방 도샤쿠, 불패의 명인이자 최후의 본인방인 슈샤쿠 등 4명이 올라 있다.)

일본기원은 그러므로 제1회 세계대회만큼은 반드시 일본이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만 재벌 잉창치가 세계대회를 연다는 소문이 들리자 서둘러 후지쓰배를 만든 이유다. 중국 바둑이 제법 세졌다고는 하지만 일본은 속으로 웃었다. 한국 바둑에 대해서는 “딱 한 사람, 조훈현 9단이 있지만 그 역시 일본에서 배운 바둑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16명의 세계 강자가 도쿄에 모였다. 한국에 배정된 티켓은 3장. 조훈현·서봉수·장두진이 참가했다. 하나 대회 첫날 1회전에서 3명이 모두 탈락했다.

한국 1회전에서 전멸 수모

한국 바둑 사상 최대 행사였던 제1회 응씨배 준결승전 전야제에서 4강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조훈현 9단, 린하이펑 9단, 대회 주최자인 잉창치씨, 후지사와 슈코 9단, 녜웨이핑 9단.

1회전 전원 탈락은 충격이었다. 그래도 개천에서 용 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것인데 1회전에서 모조리 지는 것을 보니 세계 수준과는 거리가 너무 멀구나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에서 왕위·명인 등 8개 타이틀을 휩쓸고 있던 조훈현은 당시 일본의 기성인 고바야시에게 졌다. 국수 타이틀 하나를 고수하고 있던 서봉수 9단은 특유의 근성으로 선전했으나 린하이펑 9단에게 역전패했다. 중국의 1인자 녜웨이핑 9단은 그래도 4강까지 올라갔고 린하이펑 9단에게 졌다. 다케미야가 고바야시와 린하이펑을 연파하고 우승했다.

조훈현은 회고한다. “일본의 벽은 너무 높았다. 기술적으로도 앞서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까마득했다.”

하지만 바둑판 361로는 당사자인 조훈현 9단은 물론 어떤 소설가도 상상할 수 없는 극적인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곧이어 훨씬 규모가 큰 응씨배가 시작되면서 바둑 동네는 온통 응씨배 얘기로 들끓었다. 88년 당시 40만 달러의 우승상금은 그해 US오픈 골프대회 우승 상금(18만 달러)의 두 배도 넘었다.

40만 달러, 덤 8집 … 응씨배 개막

처음엔 파리에서 개막하려다가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88년 8월 20일 마오쩌둥 이래로 중국의 주요 국가회의가 열렸던 바로 그 드넓은 장소에서 대진 추첨과 전야제가 성대하게 열렸다. ‘살아 있는 기성’으로 심판을 맡은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중국의 영웅 녜웨이핑, 그리고 중국 고위관리들이 저쪽 높은 상석에 포진했다. 한국은 16강에 조훈현 한 사람만 초청받았다. 프로기사 제도도 없는 미국(마이클 레드먼드 5단)과 호주(우쑹성 9단)도 한 명씩인데 한국이 어찌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단 말이냐고 항의했지만 주최 측은 “한국 국적의 기사는 조훈현과 조치훈 두 명”이란 대답으로 피해갔다. 일본은 응씨룰, 그중에서도 덤이 8집(일본 룰로는 7집반)이나 된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당시 덤이 5집 반이던 시절이라 일본 측은 “바둑의 본질을 왜곡시킨다”며 항의했다. 하지만 응씨 측은 수천 판의 결과를 통계로 낸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잉창치는 대만 바둑계의 대부다. 기자는 타이베이의 응씨 자택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엔 대국실이 따로 있었고 그가 스스로 고안한 대국용 바둑판과 바둑통, 초 읽는 시계, 의자 등이 놓여 있었다. 응씨룰에 따르면 쌍방 대국을 시작할 때 180개의 돌을 정확히 준비해야 한다. 공배도 집이다. 계가 때는 사석은 필요 없고 통에 남은 자기 돌로 자기 집을 메운다. 그 룰(전만법:<586B>滿法)은 대단히 합리적이지만 좀 복잡해 대중성은 떨어진다. 저장성 출신으로 당시 71세.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갔는데 짧게 깎은 머리와 호탕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40년간 바둑 룰을 연구해온 바둑광. 섬유·금융 등으로 재벌이 되자 본격적으로 바둑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응씨 사후에도 그가 남긴 기금으로 미국 등 세계 도처에서 많은 바둑 대회가 열리고 있고 그 대회 들은 응씨 룰을 따른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자리에서 기자에게 “한국 바둑이 부럽다. 대만도 그렇게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한국은 조훈현 9단이 돌아오면서 전체 수준이 높아졌다. 대만도 린하이펑이나 욍리청 같은 일류 기사 중 누군가가 돌아온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구를 이끌고 바둑에 헌신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찡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고바야시와 운명의 8강전

조훈현 9단은 후지쓰배에서 고바야시에게 참패했다. 너무 밑으로 긴다 해 다케미야로부터 ‘지하철 바둑’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그는 당시 라이벌 조치훈을 꺾고 기성과 명인 타이틀을 휩쓸며 일본의 1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조훈현은 왕밍완 9단을 꺾은 뒤 8강전에서 고바야시와 다시 만났다. 조훈현은 결코 기 죽는 법이 없다. ‘승부사 조훈현’의 최대 장점이다. 하나 최강 고바야시의 노련한 행마에 밀려 바둑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중반에 접어들 무렵엔 ‘화타가 와도 소생하기 힘든 바둑’ 되고 말았다.

조훈현은 “온몸을 짓누르는 절망감 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때부터 조훈현은 오직 최강수만 던졌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상대의 칼 끝에 주저 없이 목을 들이밀었다. 그 살기에 겁먹은 것일까. 고바야시는 목을 치는 대신 주춤주춤 물러섰다. 바둑은 점점 좁혀졌고 계가바둑이 되더니 드디어 역전됐다. 귀신이 두어도 역전은 힘들다던 그 바둑이 귀신 곡하게 역전됐다. 조훈현 1집반 승(응씨룰로는 1과 5/6집 승). 그게 기적의 시작이었고 길고 긴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만약 그 바둑에서 조훈현이 그대로 패배했다면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는 아득히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조훈현의 처절한 역전승과 대조적으로 ‘80년의 영웅’ 조치훈은 녜웨이핑에게 완패했다. 4강은 조훈현 대 린하이펑, 녜웨이핑 대 후지사와 슈코. 준결승전은 11월 20일 서울에서 열렸다.

조치훈, 녜웨이핑에게 패하고 슬피 울다

조치훈 9단은 첫 판에 호주 대표 우쑹성 9단을 맞아 고전 끝에 반 집을 이긴다. 하나 다음 상대인 중국의 녜웨이핑 9단에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완패당한다. 대국 후 만찬에서 조치훈은 술을 마시며 절망과 한탄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나는 바보입니다.” “내 바둑은 끝났어요.” “외로워요.”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의 투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기성전 결승전을 휠체어 대국으로 치른 조치훈이다. 하나 최근엔 고바야시에게 밀리며 술에 취하는 빈도도 잦아졌다는 소문이었다. “외로워요”라는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다섯 살 때 시작된 이국 생활. 그리고 끝없는 투쟁인 승부사 인생. 하지만 조치훈은 그대로 시들지 않았다. 그는 15년 후인 2003년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며 드디어 소원하던 세계 챔프가 된다.

조훈현 ‘속력행마’ VS 린하이펑 ‘이중허리’

응씨배 준결승 3번기. 한국기원이 생긴 이래 최대 행사였다. 11월 20일 롯데호텔엔 공개해설을 보려는 팬 이 무려 700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은 36세, 린하이펑 46세, 후지사와는 63세. 조훈현의 상대인 린하이펑은 신중과 끈기의 화신으로 ‘이중허리’란 별명을 갖고 있다. 허리가 한번 잘려서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팬들은 전류처럼 빠른 조훈현의 속력행마가 이중허리를 거침 없이 잘라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딱 한가지 걸리는 사건이 보름 전에 발생했다. 천하의 조훈현이 갓 입단한 유창혁이란 초단에게 대마를 잡히며 대왕전 우승컵을 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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