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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 공동 창립자, 프랑크 디 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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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무상급식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베네수엘라에선 이미 1975년부터 무상 음악교육이 실현되고 있다. ‘엘 시스테마(El Sistema)’. 베네수엘라의 빈민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음악교육 사업이다.

시작은 미미했다. 총기·마약·가난에 위협받는 11명의 아이를 모아 지하 주차장에서 악기를 가르쳤다. 모두가 악보조차 볼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연주법을 익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25명, 46명, 72명으로 인원도 늘어났다. 그들의 합주는 희망이자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는 수업이 됐다.

36년이 흐른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만 200만여 명의 아이가 엘 시스테마를 통해 음악을 배웠다. 여기서 배출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 ‘카라카스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 순회연주를 다닐 정도로 유명하다. 이제는 전 세계 25여 개국에서 엘 시스테마를 본보기로 삼는다. 국내에서도 지난해부터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기적을 이뤄낸 이들은 경제학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72) 박사, 그리고 비올리스트 프랑크 디 폴로(67)다. 둘은 오랜 친구이자 처남·매부 간이기도 하다. 26일 ‘카라카스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디 폴로를 만나봤다.

글=이도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엘 시스테마’의 뜻은.

 “영어로는 시스템, 하나의 네트워크라는 뜻이다. 엘 시스테마에서 최소 단위 음악교실인 ‘뉴클레오’는 전국에 모두 180여 개가 있다. 여기서 뛰어난 아이들은 큰 도시의 125개 오케스트라로 옮겨 배운다. 재능이 더 특출할 땐 우리의 간판인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까지 진출하는 구조다.”

●엘 시스테마를 어떻게 만들게 됐나.

 “원래는 정통 음악가의 길을 갈 뻔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재즈 음악 지휘자였고, 어머니는 소프라노였다. 4세 때 이미 바이올린을 켰고, 14세에는 미국 뉴욕음악학교에서 지휘·비올라 연주 장학생으로 뽑혔다. 공부를 마치고 베네수엘라에 돌아와 비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아브레우 박사를 만난 게 운명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 국립중앙대학에서 경제학과 작곡·지휘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와 친해지면서 함께 전국의 교회를 찾아 순회연주를 했다. 그러다 73년엔 아예 소속된 오케스트라를 나왔다. 아브레우 박사가 어느 날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프랑크, 아이들을 돌보려고 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게’. 나는 그때 모든 일을 그만뒀다. 그중엔 미국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자리도 있었다. 그 뒤 우리 둘은 전국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섰고,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2년 뒤 엘 시스테마를 만든 건 그 연장선상에 있던 일이었다.”

●가난과 범죄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왜 음악이었나. 그리고 왜 오케스트라였나.

 “악기를 가르치는 건 음악 이상의 가치를 둔다. 삶에 대한 희망이다. 가난은 외로움과 슬픔이지만 합주하는 순간만큼은 환희와 열정, 성공이다. 많은 사회문제가 배제에서 오지 않나. 오케스트라는 거대한 공동체로서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를 느낄 수 있다.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도움도 된다. 엘 시스테마의 시설 관리는 부모들의 일자리가 되고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얼마나 엘 시스테마의 교육을 받고 있나.

 “35만 명 정도다. 이는 전체 어린이·청소년의 18~20% 수준이다. 신청만 하면 누구나 엘 시스테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언제까지 배울 것인지도 철저히 본인이 결정한다. 악기·악보는 물론 간식비, 뉴클레오에 오는 교통비까지 지원한다. 악기가 갖고 싶은 10대들을 위해선 장기로 나눠 갚을 수 있는 제도도 마련하고 있다.”

●부자도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나.

 “물론이다. 대부분 빈민가에 있는 뉴클레오까지 부자의 자녀가 찾아온다면 가능하다. 가장 큰 규모의 몬탈반 뉴클레오에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딸도 다녔다.”

●부자에게도 무상교육을 해야 하나.

 “물론이다. 사회계층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교육의 기회는 동등해야 한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통합의 의미는 인종·소득과 상관없이 어울리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악기 정도만 스스로 준비해도 충분하다. 그래도 엘 시스테마의 80~90% 정도는 저소득층 자녀다.”

●예산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다.

 “75년 창립 때부터 정부 지원을 받았다. 올 2월부터는 아예 대통령 직속의 특별 국가재단이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1년 예산인 9억 볼리바르(약 3000억원)를 충당할 순 없다. 대신 금융기관·통신업체 등 기업 20~25곳과 유럽연합(EU)의 해외 지원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조금을 얻는다. 개인 기부자들도 꽤 된다. 돈뿐 아니라 본인이 쓰던 악기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그간 정부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는데.

 “운영에 가장 힘들었던 게 그 부분이다. 정권이 달라지면 그때마다 존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야 했다. 엘 시스테마를 두고 ‘연주하라, 투쟁하라’라는 슬로건이 나온 것에도 이런 배경이 있다.”

●엘 시스테마만의 남다른 교육법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것이 현악 교육법인 ‘세악(CEAC)’이다. 만 2세부터 받을 수 있는 교육법이다. 처음엔 손뼉 치고 리듬을 익히면서 놀이로 음악을 배우고, 악기도 진짜가 아닌 종이로 작게 만든다. 2~3주 뒤 바이올린부터 배운다. 바이올린을 택하는 건 이유가 있다. 일단 제대로 된 바이올리니스트를 키우려면 10~14년이 걸린다. 어린 나이에 시작할수록 유리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보에·트럼펫·플루트 등은 늦게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권한다. 또 바이올린이 현악기 중 가장 다루기 쉽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6~7세쯤 되면 각자의 신체 특징에 맞춰 다른 현악기로 바꾼다. 목이 길면 비올라를 하는 식이다. 또 2~3세에는 악보 보기가 어려운 나이라 도는 빨간색, 레는 파란색 식으로 색깔로 지도한다. 만약 6~7세에 처음 음악을 배울 땐 조금 다르다. 합창으로 먼저 음감을 익힌다. 6주간 하루 4시간씩이면 어느 정도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 악기 선택은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열 살이 지나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연령대·수준과 상관없이 개인 레슨이 아닌 15명이 함께 배운다는 점이다.”

●클래식 강습은 보통 일대일 강의 아닌가.

 “15명의 나이·수준은 모두 다르다. 한두 음계를 배운 네 살짜리가 2~3세 아이들을 그 눈높이에 맞춰 연주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이들을 ‘1차적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네 살짜리는 언니·오빠들에게서 또 배운다. 개인별 수준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 ‘음악은 즐겁게 한다’ ‘연주하면서 연주를 배운다’는 우리 철학에 따라 일단 가장 단순한 곡이라도 합주를 시킨다. 아이들은 그 순간 ‘나도 단원이구나’ 싶은 소속감을 느낀다. 경쟁심도 자극한다. 또래들과 같이 연주하면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력이 금방 느는 게 보통이다.”

●어른들도 같은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글쎄, 아닐 것 같다.”

●멕시코·아르헨티나·미국 등 25개국에 시스템을 수출하고 있다. 공통의 원칙은 뭔가.

 “정부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온 나라가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많은 나라가 의지는 있지만 완벽히 이뤄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교사의 자질이다. 각기 다른 어린아이들을 열다섯 명이나 모아놓으면 얼마나 정신없겠나. 보통 어른이면 뛰쳐나갈 수도 있다. 이를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이들만이 교사가 돼야 한다.”

●한국에서도 노하우를 배우려고 한다. 조언한다면.

 “무작정 열정만으로 시작했던 우리와 비교하면 한국은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인프라도 좋다. 나라마다 상황이 달라 말하기 어렵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음악교육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 베네수엘라가 음악 강국이 된 것 같다.

 “맞다. 70년대만 해도 베네수엘라에는 자국 음악인이 없었다. 폴란드·스페인·이탈리아 등 음악 강대국에서 온 이들이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80~90%는 외국인이었다. 오죽하면 전국에 바르셀로나인 바순 연주자가 한 명이었겠나.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엘 시스테마를 거쳐간 이들이 음악교사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 가 교육법을 전파한다. 이 숫자만 150만 명 정도다. 베를린 필하모니 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엘 시스테마를 두고 ‘음악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베네수엘라에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명 음악가가 되지 못한 게 아쉽지 않나.

 “음악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나는 현재 엘 시스테마 전체 오케스트라의 영상감독이자 프로듀서다. 늘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일하는 셈이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는 유스 오케스트라 지원기금 마련을 위해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일년에 서른세 번 정도 된다. 바로크에서 아르헨티나의 탱고까지 즐겁게 연주한다. 한국 공연 뒤에도 스케줄이 줄줄이 잡혀있다. 미국·러시아·남아공 공연까지, 그 현장에 내가 있다.”

WhatMatters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공유 혹은 나눔이다. 주위 사람들과 내가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영혼조차 공유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나눔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작은 배려, 제자들을 위한 수업, 관객이 즐기는 연주를 통해 전해진다. 내게는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한국판 ‘엘 시스테마’도 운영 중
전국 9곳서 ‘꿈의 오케스트라’
저소득층 자녀 우선 선발

‘엘 시스테마’가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청소년 오케스트라 무상 교육 프로그램이 가동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교육진흥원)은 2010년부터 전국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름도 ‘꿈의 오케스트라’다. 음악 영재 발굴이 아닌 ‘누구나 즐기는 음악’을 슬로건으로 삼는다.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은 현재 전국 9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부천·춘천·대전·화성·부산·익산·성남·광주 문화재단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다. 각각 지자체에서 추천받은 국·공립 교향악단과 협력 관계를 맺고 운영한다. 정부가 전액 지원하며 기관별 예산은 연 1억원. 향후 지자체 예산도 투입될 예정이다. 교육진흥원 측은 “이곳들은 엘 시스테마의 뉴클레오나 다름없는 역할로, 내년에는 지원 기관을 20곳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원칙적으로 ‘오케스트라 경험이 어려운 아이들’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3~5학년생이 대부분이고, 기초수급 대상자·차상위 계층·다문화 가정 등 저소득층 자녀를 우선 선발한다. 재단별 50명 정원의 70%를 차지한다. 나머지 30%는 소득에 관계없이 학교·기관 등 추천을 받아 뽑는다.

 한편 교육진흥원은 25일 엘 시스테마 측과 오케스트라 교육사업과 관련해 연내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국내 강사진이 현지에서 엘 시스테마만의 교육법을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은 물론 엘 시스테마 측이 국내 교육 시스템을 컨설팅하는 상호 교류의 길이 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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