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INVEST6] “명품 찾는 고객은 특별한 스토리 원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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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디자이너 보니 캐신이 만든 가방들.① 허리춤에 차는 ‘캐리백’. ② 야구 글러브를 본따 만든 핸드백이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가죽 색깔이 특징이며 코치 역사에서 첫 번째 ‘카우하이드’ 가죽이 쓰인 것이다. ‘카우하이드’는 가죽을 연하게 가공하는 코치만의 독특한 방식을 일컫는다. ③ 가방 옆면에 똑딱 소리가 나는 ‘키스록’ 잠금장치 지갑을 붙인 빨간색 어깨걸이 가방이다.
서울 청담동 코치 매장에서 포즈를 취한 아카이비스트 제드 위노커.④

“브랜드의 역사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아카이비스트의 역할입니다.”

미국 브랜드 ‘코치’의 ‘아카이비스트’ 제드 위노커의 말이다. 아카이비스트의 사전상 정의는 ‘기록 혹은 문서 보관 담당자’다. “도서관 사서와 비슷한 직업이냐”고 묻자 그는 “역사학자(historian)와 도서관 사서(librarian)의 중간쯤 된다”고 했다. 역사학자가 사건을 기록하듯 브랜드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는 것도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도서관 사서가 책을 일련의 방식으로 정렬하는 것처럼 브랜드에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돈하고 찾아보기 쉽게 보관하는 역할이다. 브랜드 창립 70주년을 맞아 코치 ‘아카이브(기록 보존소)’의 ‘유물’ 22 점을 들고 최근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그는 “아카이비스트는 단순히 예전 것을 보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카이비스트는 어떤 물건을 아카이브에 넣을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무작정 모으기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100년, 200년 후 브랜드를 유지할 누군가에게 아카이브에 보존된 무엇이 어떻게 쓰일지, 어떤 창작 과정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지를 생각해 결정해야 하는 거죠.”

실제로 뉴욕 코치 본사의 아카이브에는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디자이너나 소재 개발 담당자가 주로 찾는다. 새로운 제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코치의 아카이브에는 예전에 생산된 제품과 제품 제작에 밑바탕이 된 스케치 등 2만여 점의 자료가 보관돼 있다. “손을 댈 순 없지만 잘 볼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유리 상자 안에 넣어 쉽게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보관 중”이다. 그는 “‘아카이브’에 넣을 작품들을 찾다 보면 모르고 있었던 브랜드 역사를 알게 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가 가방 속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상자를 하나 열어 보였다. 박물관 학예사가 유물을 다루 듯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그는 “유물 22 점을 수하물로 부치지 않고 직접 모두 가방에 담아 운반했다”고 밝혔다. 그가 꺼내 놓은 것은 ‘행택’이었다. ‘행택’은 ‘코치’란 브랜드 이름이 금장으로 새겨진 가죽 조각을 일컫는 말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코치의 상징”과도 같다.

위노커가 VIP 고객들에게 코치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작품을 꺼내 보이고 있다.⑤ [사진=신세계 인터내셔날 제공]

위노커는 “아카이브의 자료와 제품을 분석하면서 행택과 ‘스토리 패치(브랜드 설명을 써넣은 작은 가죽 조각. 코치 가방 안쪽 주머니에 붙어있다)’가 모두 1974년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브랜드의 이야깃거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문헌정보학과 도서관학을 전공한 그는 “예술학교인 프랫에서 기록을 다루는 걸 배웠다”며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브랜드라면 아카이비스트의 역할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그 값어치가 있는 제품을 찾는 고객일수록 ‘이 브랜드는 이래서 다르군’ ‘그래서 이 브랜드가 특별하군’이란 이야깃거리를 원하기 마련이죠. 그러려면 아카이비스트는 고객들을 위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강화시키는 1차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도 명품 브랜드가 나오려면 당연히 아카이비스트가 있어야 할 겁니다.”

강승민 기자

아카이브=명품 브랜드에서 해당 브랜드의 역사에 기념비적인 상품과 제품 밑그림 등을 선별해 보관하는 곳을 일컫는다. 프랑스 브랜드 샤넬은 공방마다 아카이브를 따로 갖추고 있다. 자수 공방 ‘르사주’는 샤넬의 설립자 코코 샤넬의 작품 외에도 공방에 자수를 의뢰한 유명 디자이너의 스케치와 자수 작품을 대량 보유하고 있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를 라거펠트도 이 아카이브에 자주 들러 작품 구상을 한다고 한다. 루이뷔통은 여행용구 아카이브와 패션 아카이브를 따로 운영한다. 지난달 이탈리아 밀라노에 새로 문을 연 ‘몬테 나폴레오네 루이뷔통 스토어’에선 개장 기념으로 ‘루이뷔통 패션 아카이브 전시’가 열렸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의 역대 작품들로 꾸민 기획전시였다. 이탈리아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피렌체에 ‘박물관’을 운영해 일반 상설 전시를 하고 있고, 프라다는 2013년 아카이브의 유물과 현대 예술품을 망라한 ‘프라다 미술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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