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만남과 〈길소뜸〉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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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는 순간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인사대신 '너도 지금 TV를 보고 있냐'라고 물었고 '참 세상 많이 변했다' 라는 말도 짤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린 전화를 끊었고 다시 각자의 집에서 TV를 보았다. 아마도 하루 종일 TV를 통해 '만남(들)'을 본 것 같다.

그들이 만난 것처럼 우리 또한 북한 예술단과 기예단을 만났고, TV에서 북한 영화를 만났고(이미 TV에서 세 편의 북한 영화를 상영했다), 조만간 극장에서도 북한 영화를 만날 것 같다. 필경 모든 만남은 기쁘다. 게다가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받았던 것들과 만나기에 더더욱 기쁜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영화를 만들었기에 북한판 '춘향전'을 임권택의 〈춘향뎐〉과 만나게 하는 건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하지만 하루종일 TV를 보면서, 그리고 얼마전 보았던 북한판 춘향전을 떠올리면서 정작 떠오른 것은 임권택의 또 다른 영화 〈길소뜸〉이었고 그 영화에서의 또 다른 '만남'이었다. 임권택은 85년 이산가족의 '만남'이라는 주제로〈길소뜸〉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었다. 이 영화에서 만남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산해야만 하는 가족들, 심지어 차라리 안 만난 편이 더 나을 뻔한 가족들'의 만남을 주제로 했기 때문이다.

돈 많은 가정의 아내(김지미)가 '만남의 광장'에서 한국 전쟁당시 헤어졌던 예전의 애인(신성일)을 만난다. 이미 서로의 가정이 있기에 이들의 재회는 반갑지만 또 한편으론 서글픈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생이별을 한 그들의 자식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들이 찾은 자식은 너무나도 거칠고 영악하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자식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다소 냉정해 보이는 이 만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지 남한 내 이산 가족들의 만남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그 만남이 남북한간에서도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극적인 만남이 아닌 일상화된 만남을 지속시키는 무언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닮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을 발견하게 되는 만남은 〈길소뜸〉에서처럼 자칫 실망과 분노, 애증과 모멸을 낳을 수 있다.

〈쉬리〉에서 박무영은 남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간철 리철진〉에서 리철진은 몰매를 맞으면서 당혹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가끔 우리는 다른 나라의 영화에서 당혹스럽게 우리를 만난다: 흑인들에게 욕을 먹고(〈똑바로 살아라〉), 백인에게 총기로 난사 당하거나(〈폴링 다운〉), 택시 뒤 칸에 꾸겨진(뤽 베송의〈택시〉)채 발견된 우리의 모습들.
그런 영화들에 흥분하면서도 우리 또한 북한 사람들을 우리들의 흑인 혹은 하층민처럼 취급하진 않았을까? 50여년간 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들에서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나? 혹은 그들의 영화에서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남북한이 통일되기 이전이나 통일이 되는 과정에서 혹은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만남'은 문제가 될 것이다. 영화는 이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몇 년 전 있었던 '통독 영화제'에서 보여진 독일 통일에 관한 다큐멘터리 혹은 올해 '전주 영화제'에서 보여졌던 통일 이후의 독일 영화들은 이러한 문제에 약간의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못 보신 분들에겐 루돌프 토메의 〈사랑의 예감〉과 피터 팀의 〈트라비에게 갈채를〉이라는 독일 영화를 권하고 싶다(비디오로 출시되어 있다). 〈사랑의 예감〉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서독 여인과 동독 남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고, 〈트라비에게 갈채를〉은 동독제 고물차 트라비(트라반트 자동차의 애칭)를 타고 나폴리 여행을 떠난 동독인의 눈에 비춰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길소뜸〉은 길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마도 그 길 위에서 우리의 흩어진 형제들 뿐만 아니라 남북한 동포들의 만남 또한 계속될 것이다. 거기엔 또 극적인 감격과 흥분, 그리고 일상적인 냉정함이 뒤엉켜 있을 것이다. 〈춘향뎐〉의 임권택 감독에게 또 다른 〈길소뜸〉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나만의 바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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