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이 녹아 있는 관계의 자서전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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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시인 김혜순 님이 자서전을 쓴다면 어떨까?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시 같은 자서전이 먼저 떠오르지만 김혜순 님이 생각하는 자서전 모델은 릴리안 헬만의 〈펜티멘토〉인 듯 하다.

김혜순 님이 아주 재미있는 책을 권했다. 〈펜티멘토〉, 미국의 여류 극작가 릴리안 헬만이 69세에 쓴 자서전이다. '여성의 삶이 여성의 눈으로 녹아 있는 여성들끼리의 관계의 자서전'이라는 김혜순 님의 명징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남성 작가의 자서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영웅도, 대서사시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이웃집 가정부와 거북이도 당당히 자서전의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삶을 바라보는 헬만의 시선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헬만이 어느 날 거북이를 발견하고 수프를 끓이려고 목을 잘라 난로에 올려놓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거북이가 사라진 거예요. 집 주위를 둘러봤더니 거북이가 실처럼 붙은 목을 끌고 호수로 가는 모습을 보게 돼요. 그때부터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경외심을 갖게 되죠."

거북이 한 마리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깨닫게 된 헬만도 그렇지만 이 한 구절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기억해 내는 김혜순 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순수하고 고운 마음이 있었기에 "밤 전철을 타고" "골목의 스타킹을 벗기며 내려오는/…/맨다리의 새파란 처녀들/셔터 내린 화장품 가게 앞에서/짓밟힌 꽃다발처럼 뭉개지고/…"(〈밤 전철을 타고 보니〉중에서) 하면서 서울의 밤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너무나 아프지만 환하게 빛나는 찬란함으로.

오현아 Books 기자(perun@joins.com)

* 편집자 주: 〈펜티멘토〉의 한글 번역본은 1980년에 일월서각(전화:713-0248)에서 발간됐으나, 아쉽게도 현재 일월서각의 사정으로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 책을 반드시 보실 분은 기자에게 e메일로 연락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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