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리트 한명 구하려 … 테러·살인범까지 풀어준 이스라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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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납치됐다 18일(현지시간) 5년 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온 길라드 샬리트 병장(가운데)이 이스라엘 텔노프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아버지 노엄(오른쪽)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왼쪽)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텔노프·라말라 AP=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납치돼 5년간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군 길라드 샬리트(24) 병장이 18일(현지시간) 풀려나 고향으로 귀환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샬리트는 이날 오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차량으로 라파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 중재국인 이집트 관계자에게 넘겨졌다. 샬리트는 곧바로 이스라엘 당국에 인계됐으며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고 귀국했다.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진찰 결과 샬리트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밝혔다.

 석방 직후 이집트TV와 인터뷰를 한 샬리트는 “이번 교환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다른 팔레스타인 수감자들도 모두 풀려나 나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방송 영상에 나온 샬리트는 체크무늬 셔츠 차림에 야위어 보였지만 종종 웃음을 짓는 등 밝은 모습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웠고 집으로 돌아가게 돼 매우 좋다”고 말했다. 지난주 석방 사실을 들었다는 샬리트는 “당시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면서도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겁이 났었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후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케렘 샬롬 검문소에 도착한 샬리트는 이스라엘 육군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헬기를 타고 텔아비브 인근 텔노프 공군기지에 도착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만났다. 그러곤 미리 기다리던 가족들과 해후하고 고향 미츠페 힐라로 돌아갔다.

 샬리트는 상병이던 2006년 6월 가자지구 접경에서 경계근무 중 하마스에 납치됐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여러 차례 구출 작전을 폈지만 실패한 뒤 하마스와 수감자 교환 협상을 해왔다. 11일 양측은 샬리트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수감자 1027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AFP는 “샬리트는 1994년 이후 팔레스타인에 붙잡혔다 생존해 귀환한 첫 이스라엘 군인”이라고 전했다.

같은 날 이스라엘에서 풀려난 팔레스타인 수감자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라말라에서 딸과 포옹하고 있다. 라말라에는 2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1차로 풀려난 477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반겼다. [텔노프·라말라 AP=연합뉴스]

 이스라엘도 이날 1차로 석방하기로 한 477명(남성 450명, 여성 27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이집트 라파 국경검문소에 이동시킨 뒤 샬리트가 귀환하자 팔레스타인으로 이들을 넘겼다. 석방자 중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지만 이스라엘이 귀환을 반대하는 40여 명은 터키·카타르·시리아 등 제3국으로 추방됐다.

나머지 팔레스타인 수감자 550명은 두 달 내 석방될 예정이다. 수감자들은 팔레스타인 영토 내 라파 국경소를 통과한 뒤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을 만나 기쁨을 함께했다. 팔레스타인 곳곳에선 이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왔다. 시민들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환호했다. 하마스 측은 “가자시티에서 약 20만 명의 시민이 모여 귀환자들을 대규모로 환영했다”고 밝혔다. 하마스와 대립 중인 팔레스타인 파타당의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수반도 귀환한 석방자들을 “자유의 전사”로 부르며 교환을 축하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현지에선 이번 교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석방자 중 이스라엘 민간인에 테러공격을 가한 이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석방명단엔 2002년 해안도시 네타니아에서 29명을 숨지게 한 자살폭탄테러의 모의자 나세르 야타이마 등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중범죄자가 다수 있다. 이외에 이스라엘인을 살해하거나 폭행한 재소자들도 석방된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1027명의 석방자 중 300여 명이 폭력범죄 연루자라고 전했다.

 샬리트 구출 협상을 해온 이스라엘 정부는 그동안 이스라엘에 수감된 중범죄자를 석방하라는 하마스의 요구를 거절해왔다. 하지만 샬리트의 부모가 지속적으로 구명운동을 벌여 샬리트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라이언에 비교되는 등 반드시 귀환시켜야 할 인물이 되며 부담이 커졌다. 결국 여론에 밀려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의 제안을 수용했다. 여기에 최근 유엔에 정식 회원국 신청을 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수반을 견제하기 위해 압바스의 파타당과 대립하는 하마스에 화해 제스처를 보낸 것이란 분석도 있다.

 현지엔 돌아오는 샬리트 병장의 사진과 그림이 걸리는 등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테러 희생자 가족들은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에 반발한다. 이들은 인질합의가 발표된 11일 법원에 수감자 석방을 중지해 달라는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고등법원은 17일 “교환 문제는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결정”이라며 기각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텔노프 기지에서 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측의 공격으로 가족·친지를 잃은 이스라엘 국민의 고통을 이해한다”며 “석방된 테러리스트들 가운데 다시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에겐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하마스 측은 “이스라엘은 무고한 팔레스타인인들을 가두고 있다”며 수감자의 추가 석방을 요구할 기세다. 현재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는 약 5000명에 이른다. 뉴욕 타임스는 “샬리트 석방을 오랫동안 요구해온 이스라엘 국민은 이번 포로교환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론 테러범 석방으로 자국 안보가 위험해지는 걸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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