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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제도와 운동의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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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창극
대기자

세계는 운동(movement)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아랍은 민주화 운동으로, 미국은 ‘월가를 점령하라’는 반금융 운동으로 들썩거린다. 이런 운동은 기존 제도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국가의 독재에 대한 반발이며, 세계 경제의 위기를 몰고 온 탐욕한 금융인들에 대한 반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운동은 수시로 있었다. 기존의 제도가 현실과 유리될 때 밑으로부터의 변화 욕구가 이런 운동으로 분출돼 왔다. 이런 운동이 기존 제도를 뒤엎으면 그게 바로 혁명이고, 기존 제도가 이를 흡수하면 세상은 한 단계 진보하게 된다. 어떤 운동이든 그것이 지속적인 활동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제도로 발전돼야 한다. 문명이란 제도화와 같은 말이다. 세상 질서와 떨어져 있는 종교까지도 지속적인 종교운동이 되기 위해 제도화가 불가피했다. 문제는 제도화가 완성되면 모든 제도에는 기득권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제도라는 틀이 변화하는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구 혁명론이 나오고 끊임없는 개혁운동이 나오는 것이다.

 지난 추석 전후 일어난 돌풍도 내가 보기에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것은 반(反)정당 운동이었다. 정당이라는 제도에 대한 불신이 응집돼 나타난 현상이다. 민주당은 이 운동에 휩쓸려 힘없이 주저앉았다. 1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있고, 60년 역사를 가졌다는 정당이 한 사람에게 맥없이 쓰러졌다. 한마디로 민주당의 붕괴요, 우리 정당 제도의 몰락이다. 그 구성원들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 원인에 대해 나올 수 있는 말은 다 나왔다. 정당에 대한 저주가 쏟아졌다. 정당 때리기가 유행병이 되었다. 이는 우리 정당들의 자업자득적인 측면이 있다. 여든 야든 정당이 제도의 기득권에 몰두했다. 일단 누구든 정치권에 진입하면 바깥 세상에는 눈을 감고 자기들끼리만의 리그에 매몰돼 있었다. 진보는 복지를, 보수는 반북 구호만을 외치면 살아남을 줄 착각했다. 정당제도의 보호 속에 안주하며 현실의 떨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는 우리 정당의 역사적 유산과도 관련 있다. 우리 정당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한나라당은 이미 세워진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들러리 정당으로 출발했다. 민심에는 관심이 없고 권력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여들었던 정당이다. 민주당은 본래부터 약했다. 과거를 보면 우리가 양당제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1.5 여당에 0.5 야당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야당은 자신의 힘보다 소위 재야라는 바깥 힘에 기대곤 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반독재 투쟁도 재야의 힘을 빌려서 했다. 제도 밖에서 운동이 일어나면 항상 그것에 끌려다녔다. 효순·미선양 시위, 촛불시위, 희망버스 시위 등 모든 재야 운동에 야당은 기웃거렸다. 그 운동을 제도 안으로, 즉 국회로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부화뇌동했다. 이번의 결과는 그에 대한 업보다.

 나는 운동보다 제도를 믿는다. 운동은 그 성격상 언제나 일시적이다. 정당은 지속성을 갖지만 운동은 이것이 없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 운동도 제도화되지 못하면 생명력이 짧다. 들불 번지듯 갑자기 불이 붙다가 검불의 재처럼 금방 사그라진다. 운동에는 책임감이 없다. 불만에 불을 지피기는 하지만 뒷수습에는 관심이 없다. 운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정당은 그 역사와 구성 인물을 통해 향후의 정책을 알 수 있다. 다중의 일시적 모임에서 출발한 운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정체성을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의 이번 경선은 잘못된 것이다. 정당의 경선이라면 당연히 소속 정당인들 간에 하든가, 밖의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였어야 했다. 그것이 책임정당이다.

 나는 인물보다 제도를 믿는다. 아무리 좋은 인물도 제도보다 못하다.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제도가 만들어졌다. 민주화란 민주주의의 제도화다. 독재란 결국은 인물에 기대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제도는 무수한 도전을 겪으며 발전돼 왔다. 우리가 정당을 욕해도 오늘의 정당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약 정당이 무력하게 된다면 민주주의의 존립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제도와 운동의 대결로 보아야 한다. 내년 대통령 선거 역시 이 패턴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우리 정치사에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리 정당제도가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나라 운명을 들불 같은 운동에 그때그때 맡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당의 각성을 촉구한다. 제도는 운동이 일어날 때 이를 지혜롭게 흡수하면 한 단계 발전하기 때문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