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번째 편지 〈5월의 제주에서(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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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지은 집은 밤에 뚜둑뚜둑 하는 소리를 냅니다. 처음엔 아래층에서 주인 남자가 골프 퍼팅 연습을 하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아침에 그런 얘기를 하자 주인 남자는 껄껄 웃습니다. 목조 가옥은 짓고 나서 약 이 년 동안 제자리를 찾기 위해 그런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뼈를 맞추는 소리인 것입니다.

낮에는 차를 몰고 제주도를 돌아다닙니다.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다니며 현재의 나와 짜맞추기를 합니다. 사람도 가끔 새로 뼈를 맞추줘야 하는 것입니다. 밤엔 책읽기를 계속하며 더듬더듬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습니다.

올해 제주도의 봄은 주로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얼핏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가뭄을 뜻하는 말입니다. 가뭄이 들면 우선 귤나무는 제 가지에 달린 귤의 수액을 빨아먹습니다. 귤들은 곧 모두 말라서 떨어져 버립니다. 무섭게도 제 피를 마시며 버티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가뭄이 들면 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폭풍이 몰아쳐야만 바다 밑이 흔들려 먹이가 떠오르고 그래야만 물고기가 몰려든다고 합니다. 곧 한치잡이가 시작될 테고 지금은 갈치잡이철인데 어획고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합니다.

밤에 나가 보면(집에서 오 분만 걸어나가면 바다입니다) 오징어잡이 배들처럼 붉을 밝힌 갈치잡이 어선들이 수평선에 나란히 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새벽처럼 밤새 훤합니다.

하지만 이들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애환이 있습니다. 고기를 불러모으기 위해 배에 켜달은 수백촉짜리 수십개 전등 때문에 시력이 다 나쁘고 얼굴이 시커멓게 타 있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얼굴을 둘둘 감고 밤새 고기잡이를 한다고 합니다.

물질을 하는 해녀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마을 사람 중에 귀가 좋은 아주머니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전복이나 소라 혹은 오분작이를 따려면 물속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수압 때문에 귀들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싸우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냥 이유없이 무뚝뚝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등대가 있는 섭지코지에 다녀왔습니다. 섭지는 좁다는 뜻의 '협'을 뜻하고 코지는 '곶'을 말합니다. 지도를 보면 바다 쪽으로 좁게 쭉 뻗어나가 있는 지형입니다. 성산 일출봉보다 일출을 관람하기에 더 좋은 곳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다들 얘기합니다.

섭지코지엔 바람이 무척이나 거세게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옷의 단추가 뜯겨나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등대로 가는 낮은 구릉엔 유채 군락이 장관이었고 이름을 모르겠는 보랏빛 꽃들 역시 무더기로 장관이었고 말들은 바다를 향해 서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닐옷을 입은 사내들이 바위에 붙어 서서 낚시대를 들고 바람에 기우뚱거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저녁엔 해변에 서 있는 검은 말들의 실루엣 때문에 얼핏 놀라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오니 주인 남자는 외출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부인과 삼결삽을 먹으며 반주로 소주를 두어 잔 했습니다. 그러다 남편에 대한 애정어린 푸념을 듣기도 했습니다. 부인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 남자는 '성질이 급한 소년'입니다. 무엇이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당장 가져야만 합니다.

몇 해 전 자주색 레간자를 살 때의 일입니다. 한 달만 기다리면 적금을 타서 차를 살 수 있는데 '당장' 사야 하므로 몇 년 부어온 적금을 막대한 손해를 보며 해약하고 그것도 모자라 마이너스 대출을 받아 그 다음날 '당장' 차를 뽑아왔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누으며 며칠이고 신음소리를 낸답니다. 어떤 성격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얘기를 듣다 보니 주인 남자는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몇 해 전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를 끌어모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차인표가 섹소폰을 부는 장면을 보고 나서 주인 남자는 다음날 또 '당장' 어디선가 섹소폰을 사들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부인은 이런 말로 남편을 구박하고 핀잔을 했습니다.

"당신 악보 볼 줄 알아요?"
"모르는데."
"그럼 다장조 마장조는 알아요?"
"물론 모르지."
"그런데 뭐하러 섹소폰은 사왔어요?"
"걱정마. 피나게 연습해서 곧 당신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어줄게."

물론 부인은 지금껏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주인 남자는 지금도 가끔 섹소폰을 꺼내 열심히 닦는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작년 여름 어느 날엔 거실 청소를 하는데 소파 옆에 놓인 플릇이 보이더랍니다. 금방 사온 아주 새 것이었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들어와 물으니 역시 주인 남자의 소행이었습니다. 연전의 섹소폰 사건도 있고 해서 산다는 말은 못하고 슬그머니 들여와 아내 눈에 띄게 소파에 놓아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또 무얼 보고 들었는지 모른다며 부인은 혀를 찼습니다. 그 플롯도 아직까지 〈사랑의 세레나데〉는 토해내지 못하고 어쩌다 꺼내 피동적으로 닦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행복해 보입니다. 늘 부인은 남편에게 핀잔을 하는 듯하지만 남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묘한 조화가 엿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남편이 늘 사소한 문제를 일으켜주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탄력이 유지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부인은 불평을 늘어놓지만 결코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다. 분명 서로 아끼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낯선 섬까지 와서 남편과 함께 몇 개월씩 찬바람이 술술 새드는 집에서 새우잠을 자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열다섯 명의 인부들에게 하루 세끼에다 새참까지 먹이며 함께 살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주는 이런 땅입니다. 옛적부터 온갖 신화가 살아 꿈틀대고 있고 귀향온 타지의 사람들까지 거기다 또 작은 삶의 신화를 보테며 살고 있는 그런 곳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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