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택·김영택 화백, 펜으로 맺은 뒤늦은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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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 김상택 화백의 아들 승철씨(왼쪽)가 김영택 화백에게 선친의 화구를 전달하고 있다.


화백은 떠났지만 펜은 남았다. 고 김상택(1954~2009) 화백이 남기고 떠난 화구가 김영택 화백에게 전해졌다.

 김상택 화백은 본인 이름의 ‘만화세상’을 중앙일보에 만 11년간 연재했다. 김영택 화백 역시 본인 이름의 ‘문화유산 펜화기행’을 10년째 연재하고 있다.

고인의 부인 강혜경씨는 “짐을 정리하다가 쓰지 못한 남편의 유품을 발견했다. 김영택 화백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기증할 뜻을 밝히니 흔쾌히 응하셨다”고 말했다.

 펜대 6자루, 펜촉 36개들이 4묶음 19박스, 세필 9자루, 샤프펜 4자루, 샤프심 10개들이 35박스, 지우개 10개들이 6박스다. 작은 박스 하나엔 먹물이 말라붙은 펜촉들이 들어있다. 치열했던 고인의 화업 흔적이 오롯이 묻어있는 물건들이다. 값으로 따져도 몇백만원이 넘는 양이다. 그 많은 화구를 준비해놓은 것을 보면 고인은 병석에서도 작품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브라’ 펜촉은 마침 김영택 화백이 그림 그릴 때 쓰는 것과 같은 종류다.

 화구는 고인의 아들 승철씨가 지난 21일 서울 인사동의 김영택 화백 화실을 찾아가 전했다. 김영택 화백은 “이름이 비슷해 형제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생전에 만나기로 날을 잡아놨다가, 고인이 입원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10년도 더 쓸 만큼의 선물을 받았다”며 아쉬움과 고마움을 표시했다.

 부인 강씨는, 앞에 나서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던 고인을 떠올리며 이 일이 밖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펜 한 자루 들고 자객처럼 소리 없이 세상을 가르던 김상택, 바람처럼 부드럽게 세상을 어루만지는 김영택. 한 사람은 펜을 통해 세상으로 나갔고, 한 사람은 세상을 펜에 집어넣었다. 그 둘이 뒤늦게 만났다.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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