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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시장 개입보다 신뢰 회복이 우선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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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 금융시장이 수렁에 빠져들었다. 환율 폭등과 주가 급락만 보면 3년 전 리먼브러더스 사태 당시보다 더 나쁜 수준이다. 한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주요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추락한 프랑스보다 더 높다. 위기의 진원지는 유럽과 미국인데 정작 한국이 더 심한 홍역을 치르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주말 당국이 50억 달러로 추정되는 과감한 외환시장 개입을 했다. 환율 급등→외국 자금 이탈→주가 급락→환율 급등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자구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앞의 불안한 흐름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다 보면 긴 흐름을 놓치기 쉽다. 지금 한국 시장이 과도하게 몸살을 앓는 이유는 지난 2~3년간 외화자금이 물밀듯 밀려온 데 대한 반(反)작용이다. 위기에 처한 유럽과 미국이 이 뭉칫돈을 본국으로 빼가면서 환율이 급등한 것이다. 여기에다 ‘학습효과’도 가세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때마다 안전자산인 달러 가치가 급등하고, 결국 한국 같은 이머징 마켓이 달러 가뭄에 허덕였던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마냥 자유낙하할 만큼 허약한 체질은 아니다. 외환보유액은 3122억 달러에 이르고 총 외채에서 단기 외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37% 남짓할 뿐이다. 여기에다 4%대의 경제성장률에다 무역수지는 19개월 연속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불안은 과도한 공포심리 때문이지, 한국 경제 자체에 큰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번 세계 경제 위기의 향방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리지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견해는 두 가지다. 우선 이번 위기는 유럽의 재정문제와 미국의 더블딥(이중 경기침체)이 해소될 때까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주요국들의 금융·재정정책 수단이 소진돼 위기에 대처할 실탄(實彈)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으던 중국과 중동의 국부펀드마저 팔짱을 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지나친 시장 개입보다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당국의 무리한 개입은 후유증만 낳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아예 외환보유액이 바닥났고,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도 원화 환율은 1597원까지 치솟았다. 결국 삼성전자가 보유 달러화를 대량 매도하고 한·미 통화스와프가 체결되고 나서야 ‘셀 코리아’가 진정되지 않았던가. 이제 정책 당국은 긴 호흡으로 신중하게 처신해야 시장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다. 외환시장도 단독 개입보다 G20 차원의 국제공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과도한 급등락을 막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에 그쳐야 할 것이다. 증시가 흔들린다고 인위적으로 연기금을 동원해 떠받치는 것도 금물이다. 어느 때보다 정책 당국이 시장에 맞서려는 유혹부터 자제해야 한다. 무리하게 시장 흐름을 바꾸려 하면 불신만 초래할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정책 당국은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믿을 수 있도록 경제 실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설득에 나서야 한다. 금융 패닉을 진정시키는 지름길은 신뢰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