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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 파리경찰서 가서 밥 좀 사시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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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파리 특파원

‘고깃값 하러 간다’는 말이 있다. 기자 초년병 때 배운 조폭 용어다. 두목·행동대장 등 폭력배의 ‘수뇌부’가 조직 보호를 위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기로 마음먹거나, 치명적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경쟁 조직과의 싸움에 앞장서기로 결단했을 때 하는 말이다. ‘고깃값’은 후배 폭력배들이 열심히 뒤집어 알맞게 익혀 놓은 고기를 상석에서 편하게 먹었던 것의 대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 호의호식을 즐긴 ‘형님들’이 비상시에는 ‘패밀리’를 위해 헌신한다는 폭력배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고위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이 담긴 표현이다.

 이 말을 가르쳐준 강력계 고참 형사는 생명을 담보로 한 출동 때마다 이 표현을 떠올린다고 했다. 평상시에 관내 유지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고, 후배 경관과의 술자리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놓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면 조폭만도 못한 사람이 된다고 스스로 마음을 추스른다는 것이다. 그 뒤 기자도 잠입 취재나 전쟁 지역 파견 때 비슷한 생각을 해보곤 했다. 기자들도 어지간한 술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된다.

 파리의 한국 대사관에서는 22일 국회 외교통상통일 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진행됐다. 그곳에서 고위 외교관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 연출됐다. 구상찬(한나라당) 의원은 박흥신 프랑스 대사가 지난달 을지연습 기간에 외교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무단으로 스위스 여행을 했다가 주의 조치를 받은 사실을 지적했다. 박 대사는 주변 경관이 훌륭하기로 소문난 스위스 한국 대사 관저에서 지냈다. 구 의원은 또 프랑스의 3개 공관(프랑스 대사관·OECD 대표부·유네스코 대표부)이 17일 파리 근교의 골프장에서 합동 골프 대회를 열며 프랑스의 한인 기업들에 경품 또는 상품으로 쓸 물건들을 내 달라고 요청한 사실도 밝혀냈다.

 “대사는 파리 8구 중앙경찰서에 가본 적이 있나.” 구 의원의 추궁은 이어졌다. 한국인 관광객의 소매치기·날치기 등의 범죄 피해가 중국 다음으로 많은 프랑스의 대사가 대표적 사건 발생 지역인 샹젤리제의 관할서를 직접 찾아가 대책을 협의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박 대사는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구 의원은 “앞으로 경찰서에 가서 밥도 좀 사면서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부탁하라”고 주문했다. 험하고 불편한 일을 부하에게 미루지 말고 직접 나서라는 의미였다.

 지난달 말 프랑스·영국의 주리비아 대사관 외교관들은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속속 공관으로 복귀했다. 당시 한국 외교관들은 옆 나라 튀니지의 휴양지인 제르바섬의 호텔에 머물러 있었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한국 외교관은 한 명도 없었다.

 해외 주재 외교관들은 국민 세금으로 많게는 한 해 5000만원 이상 자녀의 학비를 지원받는다. 부인들도 ‘배우자 수당(참사관 부인이 한 달에 100만원 이상)’이라는 것을 받는다.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는 공무원들이다. 그들에게 ‘고깃값’이라는 표현을 알려주고 싶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