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번째 편지 〈5월의 제주에서(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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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차를 끌고 제주로 내려왔습니다. 오는 길은 멀었습니다. 서울에서 광주에 도착해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도청 건너편에 있는 〈베토벤〉이라는 음악감상실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벌써 십 여년째 광주에 내려올 때마다 나는 이 집에 들러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십니다. 주인은 사십대 초반의 독신 여성으로 1982년에 이 음악감상실을 열고 지금껏 혼자 조용히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며 해남 대둔사의 일지암 스님이 만든 우전차를 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신의철 선생의 〈망향〉을 틀어주며 봄날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낸다고 특유의 남도 사투리로 다분다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신. 스물두엇에 금남로에 찻집을 열어 이십여 년을 지키고 있는 한 여인의 은밀한 부동(不動)이 새삼스럽게 아스라하고 까마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밤에 해남까지 가야 했으므로 차를 마시고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음악이나 한곡 더 듣고 가라고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을 들으며 그녀가 갈아온 딸기 주스를 한잔 더 마셨습니다. 통유리창 밖으론 어두워오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더욱 커가고 있었지요.

어렵게 일어서 도청 지하에 세워놓은 차를 끌고 나와 광주 친구와 헤어져 땅끝으로 향한 것은 9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나주를 지나올 때 어둠 속으로 보니 배꽃은 이미 다 져버린 다음이었습니다. 남도로 가는 길은 그렇게 꽃이 져버린 밤이었고 날마저 흐렸습니다.

광주에서 들었던 〈망향〉을 귀고리처럼 귀에 달고 대둔사 아래 유선여관에 들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 있었습니다. 컴컴한 우물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누렁이가 옆에 와 지키고 있습니다. 맥주 두 병을 마시고 잠이 듭니다. 잠 못드는 숲속의 새들 소리가 밤새 귓전에 색종이처럼 어른거립니다. 몇 해 전 내려와 묵었던 내 모습을 잠시라도 떠올리려 하나 곧 사라지고 맙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둔사에 들어갔다 나와 완도로 갑니다. 훼리호에 차를 승선시키고 배고픈 고양이처럼 항구를 어슬렁거립니다. 특이하게도 상어회를 파는 집에서 머뭇거리다 그냥 나옵니다. 훼리호에는 수학여행을 가는 남원중학교 학생들로 왁자지껄합니다.

제주까지는 약 3시간 30분이 걸립니다. 갑판에 있다가 추워서 매점으로 내려가 사발면에 더운물을 부어 먹고 객실에 쓰러져 한 시간쯤 불편한 잠을 잡니다. 다도해는 흔들리는 꿈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사방에는 물결 푸른 바다만 남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끝간데 없이 드넓은 뽕나무밭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꿈을 꿉니다. 만해 한용운의 〈찬송(讚頌)〉이란 시의 한구절을 저작하며 춥게 눈을 뜹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처음 제주에 온 것은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며칠을 남루하게 보내다 바람에 지쳐 거지처럼 돌아간 기억이 있습니다. 그후 참으로 여러 차례 제주에 왔습니다. 성산과 모슬포와 고산과 협재와 서귀포에 보름씩 혹은 한달씩 머물며 섬 전체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얼 하며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려 삼십대 중반까지 말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제주처럼 아름다운 땅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곳은 아열대풍이고 비바리풍이고 유채꽃 바람이고 온갖 귀향온 꽃들의 마지막 서식지이며 또한 가여운 무덤입니다. 그러기에 바람 속엔 언제나 투명한 비애가 서려 있습니다. 현무암과 바다의 선명한 색깔은 이 땅을 영원한 귀향지로 남겨둡니다. 나 역시 그때마다 귀향 오는 기분으로 짐을 꾸려 이곳으로 떠나온 것이었습니다.

중문에서 나흘을 보내며 이리저리 차를 끌고 다니다 우연히 성산포 신양 해수욕장 근처의 유럽풍으로 지은 집을 발견한 건 엊그제입니다. 토착민들이 사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더욱 이채로워 보였습니다. 누가 사나 궁금하여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빨래를 너는 주인 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별 스스럼없이 안으로 나를 들이고는 커피를 끓여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바닷바람〉이라는 문패를 단 이 집에 묵고 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50대 안팎의 부부입니다. 주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열여덟살 때부터 무려 이십팔 년 동안 산업은행에 봉직하다 98년 5월에 그만두고 이곳 성산에 내려와 대규모 역사를 벌입니다. 집짓기가 곧 그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뉴질랜드 풍으로 지은 이 집은 가히 예술품에 가깝습니다. 주인은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친구 건축가에게 우선 설계를 맡깁니다. 성산포와 가장 비슷한 날씨와 지형을 가진 뉴질랜드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설계 도면을 뉴질랜드 현지로 보내 건축 자재 전부를 선박 화물로 들여옵니다. 현지에서 인부까지 한명 사서 화물과 함께 불러들입니다.

포크레인으로 땅을 밀어낸 다음 이들 부부는 옆집에 세들어 살며 사 개월 동안 인부 열다섯 명의 밥을 해대며 폭풍 속에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 다음 마을 사람들을 전부 불러 이틀 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이곳 주민으로 살아야 하므로 토착민들에게 신고 인사를 해야 하는 하는 것입니다.

밥을 뜸들이듯이 소나무를 쪄내 지은 복층식 이 이층 집은 얼핏 보기에는 목조 가건물 같지만 안팎이 모두 부드럽고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등 하나 수도꼭지 하나 손잡이 하나가 모두 치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부는 분홍색 벽면과 하늘색 천장으로 돼 있고 파스텔톤의 쑥색 카펫을 깔아놓아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바람과 낭만의 미술관, 이라고 말입니다.

담장은 4톤 트럭 스물다섯 대 분량의 현무암으로 올리고 이백오십 평의 정원은 야자수와 잔디로 가꾸어 놓았습니다. 작년에 태풍이 불 때 밤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집이 무너지지 않았느냐고 걱정들을 했다고 합니다.

주인은 공사 과정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사진첩에 꼼꼼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마을 사람들의 테니스 강습을 해주고 낮에는 주로 윈드 서핑을 합니다.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찾아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시골에 살려면 인심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 남들보다 오 년 내지 십 년 빨리 정년 퇴직을 했다고 말합니다. IMF 때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아마도 모종의 상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퇴직을 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은 성산에 내려와 술만 마시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집짓기는 그의 전생애를 밀어넣는 대역사였던 것입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큰아들은 군대에 가 있고 작은 아들은 제주대학교 기숙사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그 아들의 방이 있는 이층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저녁 한끼는 이들 부부와 식사를 합니다. 부인 또한 서글서글하고 말을 재밋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삶을 서로 잘 견디고 지켜온 사람의 아름다운 결이 느껴집니다. 다음 번엔 이 부인에게서 몰래 엿들은 집주인의 얘기를 전해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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