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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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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27년 영국 신문 1면에 ‘놀라운 쌍둥이, 지문이 똑같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영국 병리학자가 발표한 논문을 인용했다. “일란성 쌍둥이 지문 중 특정 부분이 거울처럼 일치한다”는 내용이다. 가장 놀란 건 세계 각국의 경찰이었다. 런던 경찰국에 확인 문의가 쇄도했다. ‘만인부동(萬人不同)’의 지문이 똑같다고 했으니 그럴밖에. 의학 잡지 ‘랜싯(The Lancet)’이 논문에서 쌍둥이 지문이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확인하고서야 소동은 진정됐다.

 지문에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문을 9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건 체코 생리학자 푸르키녜다. 1823년 무렵이다. 지문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연구는 훨씬 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이 시작했다. 인류학자인 골턴은 1892년 저서 『지문』을 통해 ‘고리’ ‘나선’ ‘활’ 모양의 3대 지문 기본 문형을 발표했다. 현재까지 통용되는 지문 분류법이다.

 ‘만인부동’에다 ‘종생불변(終生不變)’이니 지문은 예부터 개인 식별의 표지(標識)였다. 일본이 대표적 예다. 에도 시대 일본인들이 서명과 날인 대신 엄지손가락 지문을 찍는 무인(拇印)을 사용했다. 도공들도 자신이 만든 도기에 지문을 찍었다. 지문으로 작품의 진위를 가리기도 한다. 2009년 ‘르네상스 복장을 한 젊은 여인’이란 제목의 작품은 캔버스에서 다빈치의 지문이 발견돼 진품 판정을 받았다. 앞서 2006년 이탈리아 키에티대학 인류학연구소는 다빈치 관련 문서들에서 채취한 200여 개의 부분 지문을 조합해 다빈치 지문을 복원했다.

 지문을 긴요하게 활용하는 분야는 범죄 수사다. 골턴도 지문을 이용해 범죄자를 가려내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1892년 아르헨티나 해변 마을 오두막에서 여섯 살 아들과 네 살 딸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아이들 엄마 로하스는 정부(情夫)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아니었다. 결국 문에서 발견된 피 묻은 지문이 로하스가 범인임을 밝혀낸다. 골턴의 지문 식별법을 활용한 최초 사례다. 지문 감식의 역사가 100년을 넘은 셈이다.

 우리나라 범죄 현장의 지문 절반 가까이가 무용지물이란 소식이다. 최근 3년간 수사 의뢰된 8만1705건의 지문 가운데 49%가 채취를 잘못해 감정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인적사항을 확인할 수 없는 지문이라고 한다. 유전자(DNA) 지문·성문(聲紋)도 판별하는 세상인데 기초가 영 부실한 꼴이다. ‘말로만 과학수사’란 비아냥이 나올 판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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