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국가통제 벗어나 범지구촌 초정부체 필요"

중앙일보

입력

인터넷이 주도하는 신경제(new economy)로 인해 세계는 이미 '신중세 시대' 로 접어들고 있다고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총재가 5일 경고했다.

아탈리 전 총재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는 외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자국내 기업들조차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존재성을 상실했으며, 초강대국 미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급속도로 진행되는 세계화 속에서 국가는 사냥꾼이 아니라 먹이일 뿐이라고 지적한 뒤 새롭게 발호하는 각종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영역을 요새처럼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나 개인들이 잘못 기웃거리다가는 결국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탈리 전 총재는 인터넷이 지배하는 신중세 시대를 유목민 사회에 비유하면서 사람들이 크게 '최고 유목민' '버추얼 유목민' '하층 유목민'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간계층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최고 유목민은 정보를 창출하고 운용하는 신기술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계층으로 지구상에서 2억~3억명 정도가 해당된다.

피라미드의 바닥에는 사회와 기술로부터 소외된 계층인 하층 유목민이 자리잡고 있으며 30년 뒤 90억명에 이를 세계인구 중 약 40억명이 이에 포함된다.

중간계층인 나머지 버추얼 유목민은 신기술에 의해 한층 고양될 여가와 오락 속에서 사고하거나 반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대리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대리적인 삶이 중간계층의 일반적 삶의 형태가 될 것이며 실질적인 삶은 한낱 사치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탈리 전 총재는 그러나 신기술이 창조하는 투명성과 근접성은 결국 가진자들이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소외계층의 혁명을 필연적으로 유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고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을 때 필사가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인터넷이 이끄는 신경제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며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유도(柔道)기술처럼 문제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즉 신경제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인정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새로운 부의 창출을 고무.격려하고 한편으로는 그 부를 보다 정의롭게 분배하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탈리 전 총재는 이를 위해 신경제가 만들어내는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수단을 확보하고 환경 영향과 일자리 창조, 민주주의의 발전 등을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는 범지구적 차원의 초정부체를 창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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