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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지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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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외계 생명과의 만남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는 모습은 이상하지만 생명을 사랑하는 순수한 생명체다. 지구인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친구’다. 그가 떠나면서 챙긴 것은 화분 하나다.

 그러나 대부분은 약탈자이자 파괴자로 그려진다. 여전사 시거니 위버가 사투를 벌였던 ‘에일리언(Alien)’은 흉측하면서도 영악하다. 그에게 인간은 한낱 영양소일 뿐이다. ‘인베이젼(Invasion)’에서 외계 물질은 인간의 신체를 강탈한다. TV드라마 ‘브이(V)’에서는 인간의 탈을 쓰고 거짓 평화를 외친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악전고투 끝에 물리치는 ‘프레데터(Predator)’도 알고 보니 외계 생명체다.

 팀 버튼의 ‘화성침공’은 외계인에 대한 막연하고도 오랜 경계심이 바탕이다. 무차별적인 파괴에서 지구를 구한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다. 그 선율과 파장에 화성인 머리가 공명(共鳴)하며 터지는 것이다. 아마도 1938년 미국 CBS라디오의 ‘우주전쟁’ 해프닝을 거꾸로 패러디한 것 아닐까. 당시 화성인 침공의 가상 방송에 120만 청취자가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다.

 어쩌면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은 인간 본연에 있는지 모른다. 환경과 조화하기보다 끝없이 자원을 고갈시키고는 이주하는 속성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워쇼스키 형제가 자조(自嘲)하듯 마치 바이러스처럼. 그래서 상대적 문명우위의 외계 생명체를 약탈자와 파괴자로 그린 것 아니겠나. 스티븐 호킹이 “외계인은 있다. 그러나 접촉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인간적인 시각에서 미지(未知)와의 조우(遭遇)를 경계한 것이다.

 제네바대학과 유럽남부천문대 연구진이 물과 생명체 존재가 가능한 외계행성 ‘수퍼 지구’를 발견했다. 거리가 36광년 떨어져 있다니 한편으론 다행인가. 1937년부터 BBC가 극초단파 방송을 시작했는데, 그간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SETI)’에 아무런 반사신호가 잡히지 않았으니까. 이는 생명체가 있더라도 ‘지적(知的)’이지 않다는 방증이니까.

 외계 생명체는 종교와 존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도전은 과학의 숙명이다. 톨스토이가 『인생론』에서 경고한 ‘무익한 사색’이거나 고골리가 『죽은 영혼』에서 비아냥댄 ‘코끼리 알의 두께 측정’일지라도. 하지만 이런 천착이 ‘사색의 전환’에 동력원이 아니겠나.

박종권 jTBC특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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