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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접촉 막전막후 500일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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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통일의 지평이 열렸다. 분단 55년만에 남북의 두 정상이 오는 6월 역사적인 만남을 가진다. 한반도 허리를 잘라놓은 철조망의 높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던 南과 北. ‘통일’이란 민족의 대명제 앞에 두 정상이 마주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두 정상은 정치·경제 카드를 놓고 흥정을 벌이기도 했고 진의를 서로 타진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서해교전 사태로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정상회담 합의에 이르기까지 숨가빴던 남북간 500일간의 막후 접촉 과정을 정밀추적했다. <본 기사는 취재원과 관련자의 증언을 토대로 종합 재구성한 것으로 관계자들의 신원 보호를 위해 일부 지명과 인명에 가명을 사용했음을 밝혀 둡니다.-편집자 주>

1998년 11월28일 베이징(北京)
수도공항. “쐐-액―.” 북한 고려항공 소속 JS 152편이 항공기 특유의 굉음을 내며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옛소련제 TU-154 군용기를 개조한 고려항공 비행기는 천천히 계류장으로 굴러 들어왔다. 해치가 열리고 공무석(1등석)
승객들이 먼저 트랩을 내려왔다. 승객들 틈에는 감색 싱글 양복에 ‘올백’ 머리 그리고 더블 브리지 안경을 착용한 50대 중반의 사나이가 내려왔다. 그 뒤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사나이가 뒤따르고 있었다.

일반 여객들과 함께 공항 세관 이민검역실(CIQ)
구역으로 들어간 두 남자는 마중나온 제3의 남자를 만났다. 구면인 듯 세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바로 외교관 전용(DIPLOMAT ONLY)
출구로 향했다. 여권심사대에 근무하는 중국 정보기관 외사과 기관원도 여권을 한번 흘낏 볼 뿐이었다. 순식간에 공항 건물을 빠져나온 일행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검은색 벤츠280을 타고 베이징 시내로 향했다. 북측 일행이 출구쪽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확인한 중국 정보기관의 외사과 기관원은 유선을 통해 본부를 호출했다.

“중학생 두명이 평양에서 막 도착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대답은 극히 간단했다.

“뚜이.(알았다)

2시간 뒤 올백의 사나이는 베이징 시내 조양구(朝陽區)
용마로(龍馬路)
50번지에 소재한 특급 호텔 10층 스위트룸에 있었다. 창밖으로 회색빛 스모그에 휩싸인 베이징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행원이 신호를 했다.‘손님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초인종이 울리자 올백의 사나이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서울에서 온 장년의 사나이가 서 있었다. 1m68cm 될까. 자그마한 키에 네모진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두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온 사나이가 인사말을 건넸다.

“TV에서 자주 뵈서 그런지 이렇게 만나뵈니 구면 같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그러자 올백의 사나이도 즉각 말을 받았다.

“선생이 나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지만 남조선에 대해서는 나만큼 모를 겁니다.”
올백의 사나이의 이 말 한마디에 딱딱했던 분위기는 일순 풀어졌다. 두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웃었다. 곁에 서 있는 양측 수행원들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 서울에서 온 사나이는 국가정보원 대북담당 김보현 국장이었으며 올백의 사나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시아태평양위원회 고문 전금철이었다.

그러나 이날 전금철과 김국장이 나눈 악수는 그로부터 500여일간 추진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큰 그림의 한조각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한반도 냉전종식을 자신이 달성해야 할 필생의 목표로 간주해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500일 이상을 평양의 김정일(金正日)
총비서와 물밑에서 온갖 게임을 벌여왔다.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과 노동당 1호청사의 김정일 총비서는 이 채널을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자 답답해하기도 했다. 남북 정상은 정치·경제적 카드를 내놓고 흥정을 벌이기도 했으며 상대방을 활용하고 가끔은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기도 했다. 또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으로 그동안 어렵사리 쌓아 놓은 정상회담 준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봐야만 할 때도 있었다.

이 기사는 아직도 두터운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남북 정상회담 내막을 밝히기 위한 탐험이다. 기자는 이 탐험을 떠나면서 C를 길잡이로 삼기로 했다.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비밀접촉 내용은 국정원의 존안자료 파일 속에 보관돼 있다. 정상적인 취재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북 비밀접촉을 한발짝 떨어져 관찰해온 C가 지금까지 만나본 증언자로서는 가장 본 내용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C는 남북한 사정은 물론 특히 베이징 정보에 밝은 50대 후반의 남성으로 현재 국내에 거주하지 않는 인물임을 밝혀둔다.

중국 공안이 붙인 북한측 코드명 ‘學生’

지난 1997년 12월17일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제일성(第一聲)
으로‘남북정상회담’을 북한에 제의했다. 그러나 최초로 남북이 물밑접촉을 개시한 것은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1998년 5월쯤이었다. 그러나 이를 ‘접촉’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어설프다. 엄밀한 뜻에서 이는 접촉에 앞서 서울과 평양의 ‘응수타진’ 정도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C에 따르면 중국이 남북 비밀접촉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중국당국은 북측 인사가 베이징을 찾을 때 이들을 ‘학생’이라는 코드명으로 부르며 비자 등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이는 ‘대포동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1998년 8월31일 북한의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여파로 일본이 전역미사일방공망(TMD)
도입을 서두르는 등 동북아에 강경기류가 흐르자 베이징은 내심 당황했다고 한다. 그 결과 베이징은 종전의 방관자적 자세에서 벗어나 남북대화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일본도 남북 접촉에 이어 북·일 접촉을 시도하는 등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베이징호텔에서 만난 전금철과 김보현국장이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C에 따르면 남북 밀사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들은 5개월전 불발로 끝난 ▷남북비료회담과 ▷햇볕정책 전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남측은 북측에 ▷남북대화 재개에 대한 모종의 방안을 전달했다.

전금철은 이 비밀접촉을 시작할 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전은 처음 얘기를 시작할 때 “여기서 밝힌 내용은 노동당이나 상부(김정일)
의 의견이 아닌 어디까지나 아태의 입장”이라고 선을 그었다고 한다. 또 그는 “남측이 제시한 내용은 상부(김정일)
에 보고하겠지만 그대로 반영 안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남북 밀사들은 오전, 오후로 나눠 3일간 모든 얘기를 나눈 후 저녁에는 자리를 옮겨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다만 남측 김국장이 주량(酒量)
에서 전금철에게 밀리는 관계로 전금철은 양주를, 김국장은 매실주를 각각 마셨다고 전한다.

전금철과 김보현 국장간의 악수는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청와대의 김대중 대통령과 노동당 1호청사의 김정일 총비서는 이 채널을 통해 정상회담을 포함한 온갖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었다. 또 이때 개설된 김보현-임동원(林東源·국정원장)
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대북라인과 전금철-김용순(통일전선사업담당비서)
로 이어지는 대남라인은 그후 이어진 6·3 비료회담부터 정상회담까지 일관되게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남북관계 일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조인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84년 11월 남북경제회담
■1985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 7·7선언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1992년 2월 남북기본합의서 합의·발효
■1994년 6월 남북정상회담 합의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8년 2월25일 김대중 대통령 햇볕정책 발표
■1998년 4월 남북비료회담(베이징)

■1998년 6월22일 강릉에 북한 잠수정 침투
■1998년 6월23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소 몰고 방북
■1998년 8월31일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1998년 11월18일 금강산 관광선 첫 출항
■1999년 2월3일 북한, 하반기 정치회담 제의
■1999년 6월15일 서해교전 발생
■1999년 6월 남북차관회담(베이징)

■1999년 10월19일 김대통령, 남북경제공동체 건설 제의
■1999년 12월 남북통일농구대회 개최(서울)

■2000년 1월3일 김대통령, 남북국책연구기관 협의 제의
■2000년 3월10일 김대통령, 베를린선언
■2000년 4월10일 남북정상회담 공동 발표

1999년 1월1일 허탈한 청와대 “속았나?”

1999년 1월1일 청와대 외교안보실과 국정원에는 허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두달전 전금철은 베이징 비밀접촉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한가지 귀띔을 해주었다. “1월초(신년사)
에 뭔가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귀띔에 따라 청와대와 국정원은 북측 신년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일 신년사에 남북대화와 관련해 진전된 내용이 나오면 이는 남측이 앞서 제안한 남북대화 내용이 평양에 성공적으로 접수됐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날 발표한 신년사에는 남북대화와 관련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북한의 공동사설은 “제국주의자들의 사상·문화적 침투에 모기장을 든든히 치자”고 종전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말았다.

신년사는 아직도 남아있는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굳이 해석을 가하자면 남측으로부터 남북대화 제의를 받은 북한이 내부적으로 이를 소화해 내느라 한달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북한의 의미 있는 반응은 그로부터 한달 뒤에 나왔다. 평양은 2월3일 ‘남북 고위급 정치회담’을 제의해 왔다. 북한은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공식 호칭을 사용하면서 ▷반북(反北)
공조체제의 파기 ▷합동군사 훈련 중지 ▷보안법 철폐 ▷자유로운 통일활동 보장 등의 조치를 취한다면 하반기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평양의 요구 중에 그들의 단골 메뉴인 ‘국정원 해체’와 ‘강인덕 통일부 장관 퇴진’이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자신들이 국정원 대표와 실질적인 협상을 하면서 국정원을 해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점을 깨달은 조치로 보인다.

강인덕 장관 퇴진 요구가 빠진 것을 설명하려면 다소 복잡해진다. 강장관은 그해 5월 고급 옷로비사건에 부인이 연루돼 불명예 퇴진한 것으로 돼 있다. 순수하게 생각하면 이는 정권내 스캔들로 인한 인책성 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음모론적으로 해석하면 혹시 강장관의 퇴진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서울과 평양의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進退兩難에 빠진 페리 美북한조정관

북한으로부터 ‘하반기 남북정치회담’회신을 받아든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그로부터 7개월간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9년 한반도 문제의 최대 변수는 ‘금창리’와 ‘페리’였다. 한해 전인 1998년 8월31일 북한이 대포동1호를 발사, 그 파편이 알래스카 앞바다에 떨어지자 미중앙정보국(CIA)
과 미 의회 강경파들은 대북 총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특히 CIA는 금창리 문제를 물고늘어졌다. CIA는 북한이 평안남도 대관리·금창리에 파고 있는 거대한 지하시설이 핵무기 은닉시설일 공산이 크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북한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만일 금창리가 핵무기 저장소로 판명되거나 페리 조정관이 강경한 대북정책보고서를 제출할 경우 1994년 10월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핵합의가 휴지조각이 돼버리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북한 핵시설 공습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면 김대통령이 추진하는 햇볕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정상회담 카드는 꺼내보이기도 전에 무산될 판이었다.

김대통령과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필사적으로 페리에게 매달렸다. 청와대가 얼마나 페리 조정관 설득에 열심이었나를 알려면 임수석의 행보를 살펴보면 된다.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지난 1999년 1월27일 워싱턴에서 페리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3월9일(서울)
, 5월24일(도쿄)
, 5월29일(서울)
, 8월27일(워싱턴)
, 9월22일(워싱턴)
등 총 6회 이상 폐리를 만났다. 외무장관도 아닌 임수석이 페리를 평균 두달에 한번꼴로 만난 것은 대통령이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나를 보여주는 사례다.

C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99년 3월9일 청와대를 방문한 페리 조정관에게 “남북정상회담을 목표로 한 비밀접촉이 진행중”이라고 털어놨다고 한다.

김대통령의 귀띔은 페리를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의회로부터 한반도 조정관으로 지명된 페리로서는 공화당의 강경한 입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서에 공화당이 원하는 강경한 내용을 담아 제출할 경우 이는 청와대가 추진하는 남북정상회담의 싹을 자를 수도 있었다.

노회(老獪)
한 페리는 변증법적 선택을 했다. 보고서 제출 시기를 늦춘 것이다. 당초 페리보고서는 5월중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실제 페리보고서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0월이었다. 김대통령의 귀띔을 받은 페리가 청와대에 5개월간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결국 페리의 북한보고서는 김대통령의 햇볕정책 개념이 상당부분 반영됐다. 또 금창리 사찰도 무사히 지나갔다. 페리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청와대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남한측 실무주역 김보현은 누구인가

국정원 최고의 대북전략통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김보현 국장은 국정원 최고의 대북전략통이다. 196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 들어간 이래 줄곧 북한정보 분석과 전략기획쪽에만 매달려 왔다. 현 국정원장인 임동원 원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1998년초.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있던 임동원씨는 정부내 대북문제 조정기구인 통일안보조정회의를 주재하면서 분석력이 뛰어난 김국장을 눈여겨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김국장은 임동원 수석의 지휘를 받아 대북라인을 가동, 1998년 4월 비료회담과 1999년 6월의 남북합의를 이끌어냈으나 두번 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은 임동원-김보현 라인이 김대중 정부에서 두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낸‘작품’에 해당한다. 30년 넘게 북한문제를 다뤄온 분석통답게 북한 문헌에 밝고 정세분석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 국정원 출신답게 말을 아끼는 편이나 북한문제를 설명할 때는 차분한 말투로 두 손으로 제스처를 써가며 말하곤 한다. 제주도 출신답게 초밥을 좋아하며 소주 한병이 정량(定量)
.

예상치 못한 서해교전 발발로 위기 맞기도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의 파도가 그동안 쌓아온 남북정상회담 준비작업을 휩쓸어버린 적도 있었다. 김보현-전금철 비밀라인은 지난해 5월 몇주간에 걸친 비밀협상끝에 이산가족과 비료를 맞바꾸는 6·3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그로부터 12일 후에 발생한 서해교전 사태로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꽃게잡이로 시작된 서해사건은 결국 6월15일 17분간의 해상교전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금강산에서는 민영미씨가 억류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국민감정이 들끓었으며 이는 비료 제공→이산가족 상봉→식량 제공→남북당국 대화→특사교환→남북정상회담으로 에스컬레이트되는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김대통령과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남북정상회담 구상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베이징 채널만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월간중앙”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국정원(옛 안기부)
, 정치권, 통일부, 외교부, 현대 등 각종 채널을 통해 다양한 남북접촉을 시도했다. 또 이 가운데 지난 1999년 9월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을 통해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전달한 남북정상회담 내용은 지난해 “월간중앙” 5월호를 통해 단독 보도된 바 있다.

1999년 6~12월은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은밀한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기간일 것이다. 외관상 이 6개월 동안 남북간에는 이렇다할 만한 사건이 없었던 기간이다. 오히려 이 시기는 비관론과 허탈감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햇볕론의 설계자인 임동원 외교안보수석과 그의 대북라인이 지난 8개월간 공들여 만든 남북대화 프로그램은 예기치 않은 서해교전으로 뚜껑을 열어 보기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또 평양은 이 사건을 두고 “남측이 먼저 배신했다”고 가시돋친 비난을 가했다. 이어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9월2일 특별보도를 통해 북방한계선(NLL)
무효화를 선언, 한때 남북관계는 험악해지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는 내부적으로 평양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 북한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던 미국의 전 국무부 북한데스크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평양에서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북한의 생존전략이었다. 특히 경제문제와 대외관계가 집중 논의됐다.

북한의 생존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최소 200만t의 식량지원과 100만t의 석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에 식량 15만t, 석탄 10만t을 ‘우호가격’으로 대줄뿐이다. 석유 사정은 더욱 빡빡하다. 현재 북한은 함경도 선봉군의 승리화학과 평안북도의 봉화화학 등 2개의 정유공장을 갖고 있다. 이들 시설을 합치면 150만t 정도의 정제능력이다. 북한이 전력 등 최소한도로 공장을 가동하려면 100만t 이상의 석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이 대주는 석유는 연간 11만~20만t에 불과하다. 북한을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게 놔두는 것이 중국의 전략적 목표에 부합된다는 베이징 당국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미국이 매년 중유를 50만t씩 대주고 있으나 이는 산업 및 난방용으로 쓸 수 없는 기름이다.

식량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한해 600만t 정도의 식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이은 가뭄과 낙후된 영농방식으로 식량 생산량은 1996년 345만t을 기록한 이래 97년(369만t)
, 98년(349만t)
, 99년(360만t)
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1999년 현재 식량 부족량은 240만t이다. 미국이 금창리 사찰을 조건으로 60만t, 중국이 15만t 그리고 유럽과 유엔이 20만~30만t 정도 지원하고 있으나 여전히 100만t 이상이 부족한 형편이다.

페리보고서가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난 1953년 7월 휴전 이래 미국의 대북 정책은 억지력에 바탕한 봉쇄정책 뿐이었다. 그러나 페리는 봉쇄 못지않게 대북 포용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를 활용해야 한다. 또 공화당 정권이 백악관을 점령하기 전에 클린턴이 백악관에 있을 때 진전을 이뤄놓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일본과 수교협상을 벌여 청구권 등의 명목으로 50억달러를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돈 역시 바로 얻어낼 수 있는 돈은 아니다. 지난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룬 남조선의 경우도 협상에만 15년 넘게 걸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당장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남조선밖에 없다.

노동당 1호청사에서 벌어진 이 논쟁에는 크게 두그룹이 대립했다. 외무성(백남순)
, 통일전선사업담당비서(김용순)
등 대남 관련 부서들이 한그룹을 형성했으며 중앙군사위(김일철 무력성)
, 검열위원회(박용석 위원장)
등 대남 경험이 적은 그룹들이 또 다른 축(軸)
을 이뤘다.

비서국은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 같은 비서국이라 해도 통일전선 사업담당비서인 김용순과 계응태(공안담당)
이나 김국태(간부담당)
같은 간부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취했다. 한편 김정일을 포함, 북한의 원로원(元老院)
에 해당하는 정치국의 박성철·김영남·전병호·한성룡 등은 주로 듣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팔짱을 끼고 이 논쟁을 지켜본 김정일 총비서는 마침내 ‘주체적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즉, 남조선을 활용해 경제난을 해결하는 한편 내부 단속은 더욱 철저히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남한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아 북한경제를 회생시키자는 김정일의 결론은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김대통령의 전임자인 YS가 지난 1993년부터 줄곧 해오던 얘기였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래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로 간주해온 조선노동당으로서는 이 뻔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5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북한이 1999년도 하반기에 생존전략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진통을 겪었음을 시사하는 두가지 징후가 있다.

하나는 지난해 11월15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김계관-카트먼 회담이다. 당초 워싱턴은 이 회의에서 북한의 고위급 인사 문제를 협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회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계관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회담을 공전(空轉)
시켰다. 회담 분위기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측은 고위급 인사의 방미에 대해 가타부타 딱부러지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워싱턴의 북한관측통들은 이것을 당시 평양에서 대미 노선과 관련된 일련의 논쟁이 벌어진 증거로 보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보수-개방파간의 격론에서 개방파의 손을 들어줬다는 또 다른 징후는 한장의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지난 3월26일 양강도 대흥단군 종합농장을 현지지도했다. 27일자 “노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의 사진을 10장씩이나 도배하듯 게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1면과 2면에 실린 사진이다.(사진 참조)
이 사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김정일이 아니라 김용순이다. 사진 전면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김정일이 뒷짐을 지고 현지 책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고 그 바로 뒤에는 1보쯤 떨어져 김용순이 서 있다. 그리고 계응태는 좌측으로 5보 이상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북한의 엄격한 정치 위계질서를 감안할 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계응태는 정치국원 겸 비서인 반면 김용순은 비서국 통일전선사업담당비서일 뿐 정치국 후보위원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다. 북한의 정치서열로 칠 때 계응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반면 김용순은 15위권 밖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같은 위계질서가 뒤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어느 사회든 최고통치권자와의 물리적 거리는 정치적 파워에 비례하는 법이다. 이 한장의 사진은 언제부터인지 김용순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실용주의파와 여타 그룹간에 파워 시프트(Power Shift)
현상이 발생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남측의 대북라인도 뜻하지 않은 내부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경 김보현 국장-간부S씨로 이어지는 대북라인은 퇴근후 강남 근처의 한 술집에 들렀다. 자신들의 애써 만든 대북 작품이 수포로 돌아가자 스트레스를 받은 이들은 이 술집에서 폭음을 했다. 그리고 일행 중 한사람이 취중에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문제는 이 술집이 국정원 감찰실이 평소 주목하고 있던 ‘요주의’ 장소였다는 것. 이들이 취중에 한 얘기와 전화통화 내용이 감찰실에 적발돼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난해 하반기는 남과 북, 협상관계자들 모두에게 여러모로 스산한 계절이었던 것 같다.

다급한 평양이 내민 ‘經協 카드’

일단 실용주의 노선이 채택되자 평양은 각종 채널을 통해 ‘경협’시그널을 서울로 보내기 시작했다. 북한은 LG그룹을 통해 경의선 복선화(複線化)
사업을 제의했으며 현대에는 서해공단과 전력·플랜트 사업을 그리고 삼성그룹에는 전자단지를 요청했다. 경의선을 복선화해서 남한 물자를 바로 시베리아로 실어나를 경우 연간 5억달러 이상이 고스란히 떨어진다는 점을 북측은 강조했다고 한다. 또 이 과정에서 북측이 현대에 북·일 수교시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50억달러 청구권을 담보로 잡고 현대가 우선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려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현대를 비롯한 민간채널을 통해 평양이 보내오는 경협 시그널을 읽으면서 무릎을 친 사람은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절과 통일부 장관 시절 이미 두차례나 시도했던 남북대화가 무산된 경험이 있는 임원장은 사회간접자본 등 남북 경협을 중심고리로 한 남북정상회담 프로젝트를 짜기 시작했다. 임원장은 한국개발원(KDI)
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 청와대 경제수석실 등을 동원해 대북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난 4월3일 ‘북한 특수’ 논란이 일자 청와대 이기호 경제수석이 나서서 대외협력기금(EDCF)
7,000억원, 남북경제협력기금 1,500억원, 국제협력단(KOICA)
자금 400억원과 세계은행(IBRD)
과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금 자금, 그리고 북한의 대일청구권 자금이 동원될 수 있다고 조목조목 밝힌 것도 사전에 미리 스터디해 놓은 결과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들이 ‘햇볕정책의 설계자’(Architecture)
라고 부르는 임원장은 다시 김보현-간부S씨 대북라인을 투입했다. 북한도 적극 호응하고 나왔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이때부터 대남라인을 전금철에서 송호경(60)
으로 교체했다는 점이다.<박스기사 참조>

캄보디아 대사 출신인 송호경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과 서해공단을 추진해온 현대의 대표적인 대북창구였다. 이는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현대와 사전에 깊숙한 사전교감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작업을 ‘물위’‘물밑’ 두가지로 분리해 추진해 나갔다. 임원장이 대북라인을 가동해 북한과 비밀접촉을 통해 밑그림을 그리면 김대통령이 공개적인 물위작업을 통해 공론화시켜 간다는 양동작전이다.

남북 비밀접촉 북측 주역 송호경

남북문제·외교·술실력 두루 갖춘 외교통
남북 비밀접촉의 북측 주역인 송호경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은 남북문제와 외교, 그리고 술(酒)
실력이 강한 3박자를 고루 갖춘 인물이다. 1940년 2월3일 평북에서 출생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외무성 유럽국과 조국통일국에서 지도원·과장 등을 거치면서 북·미 회담, 3자회담 등 굵직굵직한 회담에 간여해왔다. 지난 1992년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전보됐으며 이때 함께 일했던 김용순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외교부 부부장으로 롤백했으며 1995년 5월부터 캄보디아 주재 대사로 등용됐다. 1년 뒤 김용순의 요청으로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발탁됐으며 대외적으로는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직함을 가졌다.
송부위원장은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문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성격이 조용하고 매사에 치밀하며 외무성과 노동당에서 손꼽히는 ‘주당’(酒黨)
이다. 현대그룹의 금강산사업을 책임지고 추진하던 정몽헌 회장과는 가까운 사이다. 지난해 12월22일 통일농구대회 북한방문단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한 바 있다.

‘가까운 4월’의 미스터리

2000년 새해 벽두부터 김대통령은 우선 ‘경제공동체’로 운(韻)
을 띄우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사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제의하면서‘남북국책기관과 협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이어 남북은 물밑에서 활발한 비밀접촉을 갖기 시작했다. “월간중앙”의 취재에 따르면 이 기간중 남측의 모인사가 평양을 방문한 것을 포함, 남북은 베이징·상하이·싱가포르 등을 오가며 일련의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과정에는 ▷정상회담 발표 일시 ▷경협 조건과 규모 ▷분위기 조성 등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관측된다.

주목할 것은 김대통령이 2월9일 가졌던 일본 TV와의 회견이었다. 김대통령은 이날 일본 도쿄방송(TBS-TV)
과의 회견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김대통령이 취임 이후 남북정상회담 의사를 밝힌 것은 10여 차례 있었지만 김정일 개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대통령이 국가보안법 7조의 고무·찬양에 가까운 발언을 한 것은 사전에 어떤 특정 메시지가 대통령의 머릿속에 입력됐다고 봐야 한다. 추측컨대 이는 송호경이나 김용순이 비밀접촉 과정을 통해 “김대통령이 정상회담 분위기를 조성해 지도자 동지에 대해 한말씀 해주는 게 좋겠다”고 코치한 결과라고 보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이어 김대통령은 ‘경협 메시지 접수’ 신호를 평양으로 보냈다. 김대통령은 이를 위해 다소 ‘익살스런 방법’을 택했다.

김대통령은 지난 2월28일 “조선일보” 창간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아직 단언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김대통령은 “올해부터는 현대·삼성·통일그룹이 북한에 본격 투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북간에 투자보장협정이나 2중과세방지협정이 필요합니다. 또 공장이 돌려면 전력이 필요하고, 수송을 하려면 철도가 연결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북한철도 복선화 문제도 있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복선화’다. 철도 문제는 기자가 묻지도 않은 부분이었는데 대통령이 먼저 얘기해 버렸다. 이것은 김대통령이 “조선일보” 지면을 빌려 평양에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 당신들이 사람을 시켜 전달해온 투자, 전력, 철도 지원 메시지는 나에게 다 접수됐네. 그러나 이것을 추진하려면 남북간에 협정을 맺어야 하고 정상회담 문제에 대한 약속이 있어야 돼”라고 말이다.

그로부터 11일 후인 3월9일 김대통령은 비슷한 내용을 ‘베를린 선언’으로 재포장해 천명하면서 다시 한번 평양을 남북정상회담 테이블로 유도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난 10일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발표하면서 “지난 3월17일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이후 베이징에서 비공개로 만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월간중앙”의 취재에 따르면 남북은 지난 3월9일에서 11일까지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집중논의했다. 싱가포르 중심가 마리나센터 라플레 애비뉴 7번가에 소재한 리츠칼튼호텔 비즈니스룸에서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했다. 남측에서는 김보현·국장 외 간부 S씨가, 북측에서는 송호경 대표와 H·K참사 등 4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의혹으로 떠오르는 ‘이면합의’ 내용

6·12 남북정상회담의 최대 의혹은 ‘이면합의’다. 이 부분에 대해 박장관과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딱 잘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정상회담’이란 엄청난 카드를 조건없이 수용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박장관은 “북한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실용주의로 가고 있다”고 하면서도 북한이 추구하는 ‘실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서울과 평양이 4·13총선 이전에 정상회담을 발표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흥정을 벌였다는 것은 이번에 발표된 남북합의서 자체에 그 사실을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이 4월10일 발표한 합의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어색한 문구가 하나 있다. 합의서 마지막 문장이 “양측은 가까운 4월중에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4월10일 발표하면서 ‘가까운 4월중에’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어쨌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뉴스는 총선을 사흘 앞둔 4월10일 엄청난 파괴력과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남북정상회담 협상 막판에 끼어든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주무장관인 박재규 통일부 장관을 옆에 앉혀 놓고 의기양양하게 정상회담을 발표했으며, 신문과 방송은 정상회담 뉴스로 도배를 했다. 일부 성급한 언론은 김대중·김정일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과 정계개편 가능성마저 점치기도 했다.

6·12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1972년 7·4 공동성명과,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능가하는 역사적 이벤트가 될 것이다. 지난 500일간 물밑에서 온갖 게임을 벌여온 남북 정상은 지금으로부터 한달 뒤 평양에서 상대방을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부르면서 한반도평화선언(가칭)
같은 거창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의 악수는 1948년 건국과 한국전으로 두 조각난 남북이 반목과 대결을 뒤로 하고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그림으로 손색이 없다.

김대통령의 정상회담 언급 일지

1997년 12.19=남북간 교류·협력 위해 특사 교환 재개하고 필요하다면 김정일 총비서와의 정상회담을 공식 제안한다.(대통령 당선후 첫 발언)

1998년 2.25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을 제의하며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다.(대통령 취임사)

7.31=김정일의 주석직 취임이 남북정상회담 여건성숙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서울경제신문 인터뷰)

8.15=북한이 원한다면 평양에 대통령 특사 보낼 용의 있다.(정부수립 50주년 경축사)

11.2=내 임기중 김정일과 남북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 가질 것을 기대한다.(“뉴스위크” 인터뷰)

1999년 3.3=북한이 원하면 어떤 회담에도 적극 응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KBS 인터뷰)

3.24=북한과의 대화를 구걸하지 않지만 어떤 레벨의 대화도 할 용의가 있다.(통일원 업무보고시)

2000년 3.10=북한은 2년전 제의한 특사 교환을 수락할 것을 촉구한다.(베를린 자유대학 연설)

3.31=총선후 남북정상회담과 당국자회담을 본격 추진하겠다.(“동아일보” 창간기념 회견)

최원기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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