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부장의 閑가위·寒가위] 올 한가위 2006년보다 더 춥고 외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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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5년 전보다 더 추워졌다. 중소기업 박 부장의 추석 얘기다. 소득은 그대로인데 지출과 빚은 되레 늘었다. 자산가치는 떨어지고 가계 곳간은 점점 비어간다. 올 들어 고(高)물가까지 겹쳐 박 부장은 벌써 추석 보낼 걱정이 태산이다. 2011년 박 부장과 2006년 박 부장의 ‘추석 가계부’를 비교했다. 아울러 추석선물은 소셜커머스(SNS)를 이용해 구매하고, 귀향길의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한 정보는 앱으로 얻는 등 최근의 IT기술 발전에 따른 신풍속도 짚어봤다.

소득보다 지출 더 늘고 저축은 줄어 #고향 찾는 길은 앱으로, 선물 구매는 SNS로 해결하기도

중소제조업체에 근무하는 박 부장(45). 그는 한때 IT기기라면 무조건 싫었다. 2009년 가을 ‘아이폰 열풍’이 한창일 때조차 ‘왜 호들갑이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 휴대전화는 전화를 거는 도구일 뿐이었다. 애플리케이션(앱)은 쓸모없는 소프트웨어였다. 피처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작은아들 성화에 못 이겨 간신히 배웠다. 그마저도 잘 써먹지 않는다.

스마트 워커의 첫 추석 보내기
올봄, 이제 막 여섯 살이 지난 막내조카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막내조카가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화면을 옆으로 넘기려 했기 때문이다. 조카는 “큰아빠, 이 화면은 왜 안 움직여”라며 투정을 부렸다. TV·냉장고·엘리베이터까지 ‘스마트화’되는 시기를 막내조카는 벌써 대비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그제야 눈치챘다. 한편으로는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빨리 쫓아가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그 길로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터치폰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마트폰조차 다루지 못하면 사회에서 밀려날 것만 같았다. 3개월의 노력 끝에 그는 ‘스마트 워커(Smart Worker)’로 변신했다. 이제는 카카오톡을 즐기고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재미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태블릿PC도 구입했다. 그는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을 읽고 싶었다.

박 부장은 스마트폰을 구입한 후 첫 번째 맞는 추석이 흥미롭다. 추석에 대비해 수많은 앱을 다운받았다. 가장 먼저 받은 앱은 ‘교통정체 피해 가는’ 앱이다. 그는 추석이면 경북 예천으로 내려간다. 고속도로를 탈지, 국도를 이용할지 언제나 고민이었다.

귀향할 때는 교통방송을 수시로 들었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그가 귀를 기울이면 음악이나 만담이 나왔다. 올해는 앱을 믿어볼 작정이다. 앱으로 교통정체구역을 실시간 확인하면 고향에 빨리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박 부장에게 앱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에는 앱 덕분에 부인에게 뜻하지 않은 칭찬까지 들었다. 명절 음식 만들기, 차례상 차리는 방법, 명절 선물 안전하게 보내기 등 추석용 앱을 다운받아 부인에게 알려줬다. 별 관심 없을 것 같았던 부인은 “이런 게 다 있었네”라며 활짝 웃었다.

소득보다 지출 증가하는 세상
선물값도 SNS를 활용해 줄였다. 박 부장은 이번 추석 선물을 소셜커머스에서 구입했다. 대형마트보다 최대 50% 싼 가격에 샀다. 쇼설커머스는 요즘 추석 특판에 열중한다. 티켓몬스터는 ‘로네펠트 티 선물세트(페퍼민트 외 8종)’를 45% 할인한 2만2000원에 판다. 쇼퍼스데이는 ‘6년근 고려홍삼정 PLUS’ 선물세트를 66% 깎은 3만9800원에 판매한다. 스마트 워커를 자부하는 박 부장은 예년보다 한결 편한 추석을 바란다. 그가 꿈꾸는 한가위는 ‘閑’가위다.

박 부장은 SNS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산층의 모습이다. 올해로 직장생활 15년차인 그는 서울 강서구 목동에 99.9㎡(약 33평) 규모의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다. 연봉은 약 7000만원(상여금 포함). 세금을 공제하면 월 50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부인은 가정주부고, 고등학생·중학생 2남을 뒀다.

박 부장 가계는 팍팍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출내역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박 부장의 소득은 2006년 5500만원에서 2011년 7000만원으로 27% 올랐다. 반면 가계지출은 연 4400만원에서 6000만원으로 35%나 늘었다. 소득이 늘어난 것보다 지출규모가 더 증가한 것이다. 여기에 물가까지 치솟아 박 부장 가계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제는 돼지고기를 사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돼지고기(500g) 가격은 2006년 3000원에서 올해 8715원으로 2.9배로 늘었다. 배(5개)도 1만원에서 1만9750원으로 크게 늘었다.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작은아들의 학원비는 4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뛰었다. 영·수에 이어 논술까지 가르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인 큰아들은 ‘영어 말하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원어민 과외를 시작했다. 큰아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는 100만원이 넘어섰다.

박 부장이 부인에게 주는 월급 500만원은 바닥을 보인다. 부인이 “저축할 돈이 없다”고 푸념할 만하다. 박 부장 가계의 저축은 2006년부터 국내형 펀드에 25만원씩 넣는 게 전부다. 부인의 푸념도 이해가 간다. 월급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2006년 11월 받은 주택담보대출 1억5000만원의 이자 75만원부터 갚아야 한다. 박 부장은 ‘5년 거치 20년 분할상환’으로 돈을 빌렸다. 대출이자와 교육비만 합쳐도 벌써 250만원이 넘는다. 나머지 월급은 아내와 아이들 건강보험(20만원), 박 부장 종신보험(10만원)으로 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추석을 제대로 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조카들에게 용돈 주는 것도 무섭다. 만원 한 장 줘봐야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슈크림 빵 10개만 사면 끝이다. 귀향길에 써야 하는 기름값도 버겁긴 마찬가지다. 박 부장의 고향인 예천과 서울의 거리는 210㎞다. 그는 1993년식 쏘나타를 아직도 탄다. 돈이 아까워 바꾸지 않았다. 연비는 10.3~13.2㎞/L다. 2006년만 해도 5만원이면 왕복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9만원이 필요하다. 박 부장은 “소셜커머스로 선물값을 줄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자산가치 하락하고 빚은 쌓여
박 부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중산층의 현주소도 비슷하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2인 이상 도시가구의 실질소득은 올 2분기 312만원으로 2006년보다 5% 늘었다. 반대로 가계지출은 같은 기간 7% 늘었다. 중산층의 가계 곳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육비는 2006년 2분기 17만6300원에서 올 2분기 19만1300원으로 9% 늘었고, 차례상 차리는 경비는 2006년 11만원에서 2011년 20만1450원으로 72%나 증가했다. 그 결과 가구당 저축액은 2006년 12월 4570만원에서 지난해 12월 4089만원으로 12% 줄었다.

반대로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올 2분기 가계 빚은 876조3000억원을 기록해 900조원을 눈앞에 뒀다. 2006년 1분기 528조8000억원보다 300조원 늘었다. 이자부담도 사상 최대다. 전국 2인 이상 도시가구당 월평균 이자비용은 올 2분기 8만6252원을 기록했다.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이자비용 비중이 2.32%로, 통계가 작성된 2003년 이래 가장 높았다.

그렇다고 부동산을 팔 수도 없다. 아파트 가격은 하락세다. 올해 서울 지역의 3.3㎡당 매매가격을 비교한 결과를 보면, 2006년 3538만원에서 3262만원으로 떨어졌다. 양천구·강동구의 3.3㎡당 가격도 같은 기간 301만원, 193만원 하락했다.

박 부장이 정작 걱정하는 것은 추석 이후다. 한국은행 금통위가 금리를 올리면 ‘큰일’이 닥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속된 저금리 통화정책 덕분에 이자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추석이 끝난 후 세계경기가 회복되면 한국은행은 풀린 돈을 회수하겠다며 금리인상을 서두를 게 뻔하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CD금리가 동반 상승한다. 그러면 주택담보대출(변동식) 금리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시중은행이 CD(91일물) 금리에 일정한 이자율을 더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결정해서다. 가령 CD금리가 0.01%포인트 오르면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0.01%포인트 상승하는 식이다. 박 부장이 금리 인상 여부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중수 한은 총재는 지난달 11일 금리동결을 발표하면서 “장기적으로 기대 인플레이션 관리가 주요 과제”라며 “금리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박 부장은 이번 추석을 즐겁게 보내려 한다. 가족과 못다 한 이야기도 많고, 이슈도 적지 않다. 투자은행에 다니는 둘째 동생에게는 미국·유럽 재정위기의 실체를 물어볼 참이다. 버냉키 FRB(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QE3(3차 양적완화)를 미루는 이유에 대해서도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서울시장 출마 건과 관련해서는 박 부장이 할 말이 많다. 한국정치는 그의 전공과목이다.

그는 올해만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았으면’ 한다. 하지만 바람일 뿐이다. 그의 앞에는 ‘寒가위’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한국의 중산층이다.

이윤찬·김성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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