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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시대에 최인훈의 ‘광장’을 양지로 끌어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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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09면

모이를 주고 있는 1990년 무렵의 신동문 시인. [중앙포토]

1980년 봄, 2년여 병석에 있는 유주현 소설가의 홍은동 댁을 찾았다. 문병도 할 겸 중단한 연재소설 문제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늘 누워 있기만 하던 그가 그날엔 마당에 나와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얼굴이 밝아 보였고, 몸놀림도 다소 원활해 보였다. 병세를 물었다. 며칠 전 충북 단양에 살고 있는 신동문 시인이 모처럼 상경한 길에 집으로 찾아와 침을 몇 대 놔주고 간 후 몸이 가벼워지더라는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홀연 단양으로 낙향한 신동문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포도밭 농장을 운영하면서 침술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인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 각처에서 환자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무료 시술이었기에 아프리카에서의 헌신적인 의료봉사 활동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슈바이처에 그의 성을 갖다 붙여 ‘신바이처’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7> ‘신바이처’ 신동문 시인

신동문이 왜 어떻게 침술을 배웠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어렸을 적부터 병약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였던 폐결핵 등 각종 병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2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동문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병마에 시달리느라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했다. 1년에 몇 차례씩 앓아 누워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해서도 1년을 다니다가 그만둬야 했다. 동국대에 편입해서도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수영을 잘 해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에 체육특기자로 합격해 20세 때인 48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로까지 선발됐으나 하필 늑막염의 발병으로 수영선수의 꿈마저 접어야 했다. 그런 병약한 몸을 지니고도 6·25전쟁이 일어나자 공군에 자원입대해 전쟁 중 3년을 복무했다.

공군비행장에 근무하면서 매일 끝없는 창공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속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병석에서도 틈틈이 시를 썼다. 마침내 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가 당선해 등단한다. 같은 해 첫 시집이자 그의 유일한 시집인 『풍선과 제삼포복』을 내놓으면서 시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풍선기’는 공군 시절의 체험과 느낌의 산물이었고 이후 연작으로 써진다. 60년 4·19혁명 직후에 발표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群)들’과 ‘피의 화요일’ 등은 혁명의 현장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충북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신동문은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위해 60년 서울로 올라와 종합월간지 ‘새벽’의 주간 일을 맡게 되었다. 그해 ‘새벽’ 11월호에 최인훈의 문제작 ‘광장’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신동문의 공이었다. 민주화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맹목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잔재들은 여전히 곳곳에서 은밀하게 숨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한의 이기주의와 북한의 도식주의를 함께 비판한 ‘광장’이 발표되는 경우 뒤따를 파장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작품을 받아든 신동문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판단했다. 신동문은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발행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한밤중에 원고를 들고 인쇄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광장’이 인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광장’은 그렇게 발표됐고, ‘새벽’은 다음 호인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65년에는 그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던 종합월간지 ‘세대’에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해 등단시키는 등 편집자로서 작품을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하지만 막상 그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생명은 아주 짧아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65년 ‘바둑과 홍경래’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그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붓을 꺾은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새벽’의 폐간으로 직장을 잃은 신동문은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65년 그가 담당하던 특집면에 한 독자가 쌀값 폭등을 비판하면서 ‘북한에는 쌀이 남아돌아간다니 북한 쌀이라도 수입하자’고 쓴 글이 실렸다. 중앙정보부는 이 글을 문제 삼아 신동문을 끌고가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며칠간의 고문 끝에 풀려나면서 신동문은 ‘앞으로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고 한다. 물론 강압에 의한 각서였던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할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앙정보부와의 약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60년대 중반 이후 신구문화사의 주간 일을 맡은 신동문은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창비’의 편집에도 간여했다. 70년대 초 단양에 살 곳을 마련하고 언젠가는 그곳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던 중 낙향의 시기는 훨씬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75년 백낙청의 부탁으로 보관하고 있던 월남전에 관한 리영희의 글을 ‘창비’에 게재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다시 한 차례 곤욕을 치른 신동문은 차제에 아예 서울을 등지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리 마련해 둔 단양군 애곡리의 남한강 기슭에 포도밭을 꾸미고 그 앞에 농막과 침술방 따위를 만들었다.

신동문의 침술이 신통할 정도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의 농장에는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무료 시술에다 환자들을 먹이고 재우기까지 했다. 80년을 전후해서는 매일 하루 20~30명씩의 환자가 들끓었다고 한다. 그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침으로 시술한 환자들이 최소한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고, 수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환자들을 위해 그토록 헌신하던 신동문도 막상 자신의 육체가 병마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췌장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 것은 93년 봄이었다. 너무 늦었다. 몇 달간 투병하다가 그해 9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65세였다.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화장해서 유골은 농장에 고루 뿌려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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