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3) 황류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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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13일 할리우드에 도착, 여배우들의 인사를 받는 쑹메이링.. [김명호 제공]

1961년 2월 황류솽(黃柳霜·황유상)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56세, 평소 알코올 중독이 심했다. “엄마 옆에 묻어라. 내 이름이 싫다. 묘비에 단 한 글자도 새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동생들은 그대로 따랐다.

황류솽은 어릴 때부터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학교만 가면 뒤에 앉은 백인 남자애들이 머리 끄덩이 잡아당기며 놀려댔다. “중국인들은 목욕도 안 한다던데, 넌 목욕한 적 있니? 남의 빨래만 하지 말고 네 세탁도 가끔 해라.”

여자 애들도 못되게 굴었다. “빨래 많이 해야 손이 예뻐진다는 말이 사실이냐”며 샘을 냈다. 황류솽의 손만 보면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화내는 애들도 있었다. 황류솽은 손이 유난히 예뻤다. 후일 “할리우드 최고의 손”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시대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인은 무지하고, 게으르고, 겁 많고, 더러운 냄새나 풍기고 다니는 열등민족이었다. 신통한 배역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약관 22세 때 아카데미상의 제정자 중 한 사람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마를레네 디트리히, 크라크 게이블 같은 세기의 명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항상 남자들에게 얻어맞거나 죽는 역이었다. 오죽했으면 한 신문에 “묘비명은 천 번을 죽은 여인이 마땅하다”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릴 정도였다.

1930년대 말 펄벅의 대지가 영화화됐다. 중국 농민의 순박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묘사한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황류솽은 평소 펄벅과 자선단체 활동을 함께하며 교분이 깊었다. 미국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자신의 이미지를 변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인 역은 중국인이 해야 한다”며 여주인공 역을 따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남자 주인공 역이 서양인이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간 맡았던 배역과 너무 동떨어진다. 관객들이 헷갈린다. 주인공의 첩 역이라면 생각해 보겠다”는 등 맥 빠지는 답변만 돌아왔다. 할리우드에는 중국인 남자배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훼방 놨다는 소문도 한동안 나돌았다. ‘대지’의 여주인공 역을 따낸 루이즈 레이너는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황류솽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황류솽은 미 전역을 다니며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모금운동을 벌이며 자신이 소장했던 패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시 후원금으로 내놨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외면을 당했다. 미국 유학을 마친 상류사회 부인들이 특히 심했다. “황 뭔지 하는 애 때문에 미국 친구들 만나면 창피해 죽겠다. 중국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홀딱 벗고 궁상만 떠는 줄 알까 봐 미국 가기가 겁난다. 전부 저거 때문이다.” 이구동성으로 남편들을 들볶아 황류솽이 출연하는 영화의 중국 상영을 금지시켜 버렸다.

1942년 가을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루스벨트에게 쑹메이링의 미국 방문 수락을 요청했다. 이틀 후 루스벨트는 전용기를 보냈다.

쑹메이링은 뉴욕·워싱턴·시카고·샌프란시스코 등 가는 곳마다 국가원수 대접을 받았다. 미 하원과 상원에서 한 연설은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하루에 수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역시 미국의 명문대학 출신답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미국의 신문과 잡지에 실린 관련기사가 3000여 편이 넘었다.

쑹메이링의 마지막 방문지는 할리우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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