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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우리 가족 이야기 ④ 송재용·권명교씨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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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송재용(65)·권명교(61)씨네 가족은 90대인 어머니부터 10세 손자까지 4대가 한집에 모여 산다. 근처 사는 둘째 아들 병규씨네 가족까지 놀러오는 날엔 12명의 가족이 북적인다. 지난달 28일 대구시 지산동 아파트 앞 놀이터에 모인 가족들.


송재용(65·교수)·권명교(61·주부)씨네는 4대 8식구가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159㎡(48평) 아파트 한집에 모여 산다. 4개의 방을 한 세대가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가장 웃어른은 아버지 송인섭(91)옹과 어머니 고병옥(94) 할머니. 그리고 재용씨와 명교씨, 재용씨의 첫째 아들 상훈(36·부동산중개업)씨와 큰며느리 이춘화(34·피아노학원)씨, 손주인 초등학생 남매 주영(12)양과 주승(10)군이다. 둘째 아들 병규(35·커피숍 운영)씨와 작은며느리 이윤주(35·음악 교사)씨는 근처에 따로 산다. 재용씨네가 처음부터 모여 살았던 것은 아니다. 첫째 아들 상훈씨는 1998년 결혼과 함께 분가했다가 2005년 가을 부모님과 합쳤다. 핵가족이 대세인 시대에 이들은 거꾸로 다시 대가족을 이뤘다. 아들 내외가 힘들까 봐 합치기를 꺼렸던 시어머니 명교씨를 며느리 춘화씨가 설득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호된 시집살이했던 시어머니

권명교씨는 1974년 경북 문경의 송씨 가문에 시집왔다. 송재용씨네는 꼬장꼬장한 양반 댁이었다. 지긋한 연세에도 긴 머리를 비녀로 단단히 꽂은 시조모님은 추상같았다. “여산 송씨 집안 맏며느리 역할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을 수시로 들었다.

집안 아랫사람들은 일거수일투족을 시조모님께 여쭤보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시조모님 허락 없이 머리를 잘랐다가 사달이 났다. 시조모님은 음식상을 받지 않고 자리에 드러누워만 계셨다. 명교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시어머니께서 일주일 동안 무릎을 꿇고 빈 뒤에야 마음을 푸셨다”고 말했다. 시조모님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987년 묵묵히 시집살이를 견뎠던 시어머니가 중풍을 맞아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다. 명교씨가 병 수발부터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다. 명교씨는 불만이 커져갔다. “부유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집을 잘못 왔다는 생각을 하루 몇 번씩 했다.” 1년에 챙겨야 할 제사가 19번이었다. 시아버지가 문중 회장을 맡았기에 집안 어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명교씨는 “연탄불을 때 밥을 하고 부족한 양은 석유 곤로 위에 또 안쳤다. 아버님이 8남매, 남편이 8남매라 매일 20인분은 차려야 했다”고 말했다. 명교씨에게 대가족살이는 고됐던 기억으로만 가득했다. 명교씨가 대가족으로 합치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다.

대가족 따뜻함 그리웠던 며느리

왼쪽부터 아버지 송인섭(91)씨, 어머니 고병옥(94)씨, 송재용(65)씨, 아내 권명교(61)씨, 큰아들 송상훈(36)씨, 큰며느리 이춘화(34)씨, 작은 아들 송병규(35)씨, 작은 며느리 이윤주(35)씨, 첫째 손녀 송주영(12)양, 첫째 손자 송주승(10)군, 둘째 손녀 송주경(6)양, 둘째 손자 송주왕(3)군.

이춘화씨는 1998년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에 상훈씨와 결혼했다. 상훈씨는 ‘교회 오빠’였다. 묵묵히 맡은 일을 책임지는 진중한 모습에 빠졌다. 상훈씨와 동갑내기로 함께 교회에 다녔던 친오빠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부추겼다. 이미 양가 부모는 오랫동안 교회를 함께 다닌 막역한 사이였다. 결혼은 일사천리였다.

처음에는 시댁과 따로 살림을 꾸렸다. 상훈씨의 직장은 대구, 시댁은 문경에 있었다. 직장도 직장이지만 상훈씨는 춘화씨가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춘화씨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가족이 어울려 북적대는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고 동경해 왔다. 99년, 2001년 두 아이가 태어났고, 춘화씨는 아이 키우는 데 숨 돌릴 틈이 없었다.

2004년 가을, 그동안 춘화씨 부부와 함께 살던 시동생 병규씨가 결혼하자 춘화씨는 “이제 우리가 어른들을 모시고 살 때가 된 것 같다”고 남편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시 구미에 살고 계시던 시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남편 상훈씨는 “보통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따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사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춘화씨는 “어려서부터 대가족에서 살아 가족끼리 모여 사는 삶이 그리웠다”고 말했다. 춘화씨는 시어머니 명교씨에게 “구미에서 함께 사는 게 어떠시냐”고 말을 꺼냈다. 오랫동안 시부모님을 모신 명교씨는 “대가족은 아랫사람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젊은 사람이 왜 같이 살려고 하느냐”며 반대했다. 춘화씨는 “대가족 속에서 사는 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라고 설득했다. 명교씨가 꿈쩍하지 않아도 춘화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춘화씨는 “차라리 대구로 와 함께 사는 건 어떠시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계속되는 설득에 명교씨의 마음도 움직였다. 2005년 가을, 그렇게 북적대고 시끄러운 4대 가족 살림살이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106㎡(32평) 아파트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시아버지가 거실에서 아이들과 자는 형편이었지만 모두 그리워했던 생활이었다. 2007년 12월 좀 더 넓은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나만의 공간 없지만, 집안에 에너지 넘쳐

가족들은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춘화씨는 숨쉴 틈을 마련해뒀다. 남편 상훈씨와 함께 가입한 사랑의 부부합창단이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연습 모임이 있어 둘만의 시간을 낼 수 있다. 춘화씨는 “여름에는 아무리 더워도 편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기 힘든 점도 불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사람이 부대끼며 살다 보니 에너지가 넘치는 게 가장 즐겁다고 입을 모았다. 재용씨는 “식구가 모두 노래를 잘 불러 저녁이면 한바탕 노래 잔치가 벌어지곤 한다”고 했다. 명교씨는 “반경 5분 거리에 송씨 일가 5가족이 살아 아직도 손님이 끊일 일이 없다”며 “집이 늘 잔칫집 같은 분위기라 하루 종일 우울해질 틈이 없다”고 웃었다. 춘화씨는 “늘 집에 사람이 있으니 아이들도 외로워할 새가 없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다”고 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살다 보니 갈등이 없을 리 없다. 상훈씨 부부는 어른들 눈치 보는 게 가끔 힘들다고 했다. 상훈씨와 춘화씨가 아직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3~4년 전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 얘기다. 뮤지컬 공연 도중 시아버지 재용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받을 수가 없어 아무 말 없이 끊었다는 거다. 시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났고, 이를 푸느라 상훈·춘화씨는 몇 시간 동안 무릎 꿇고 빌어야 했다. 상훈씨는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일이 설득할 수는 없다”며 “일단 용서를 구하고 그 다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재용씨 부부도 어른이라고 그저 아들 부부에게 대접 받으려 하지는 않는다. 재용씨는 “남자라고 부엌에 안 들어가는 건 옛말”이라며 “남자도 설거지하는 등 역할을 분담해야 집안이 평안해진다”고 했다. 명교씨는 “나도 젊을 때 불만이 가득했는데, 요즘 애들은 오죽하겠냐”며 “집안일이 며느리 몫이 아니라 내 몫이라 생각하면 편하다”고 말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송인섭옹께 불만이 없느냐고 물었다.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집 밖을 나갈 때는 반드시 어른께 아뢰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비춰야 한다는 뜻)만 잘하면 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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