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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에 듣는 ‘구월의 노래’ ... 마음엔 벌써 낙엽 지는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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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10면

이제 막 8월을 끝내고 9월에 들어섰는데 다음 주가 벌써 추석이란다. 음력이 일러서 그런가, 올해는 유난히 초가을 느낌이 일찍 찾아왔다. 9월은 이름의 어감부터 어둡다. 팔월이란 발음의 팔팔한 느낌과 달리 구월은 발음이 어두워 무언가 수그러들기 시작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패티 김이 부른 ‘구월의 노래’는 그래서 제목부터 끌린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5> 가을의 노래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데선가 부르듯 당신 생각뿐”.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1969, 이유 작사, 길옥윤 작곡)
길옥윤의 화려한 선율은 소위 여성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만큼 부드럽게 매혹적이다. 그러고 보면 길옥윤의 노래를 남성 가수가 부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와 콤비플레이를 한 가수는 모두 여자 가수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길옥윤의 선율과, 짜랑짜랑하면서도 풍부한 감정을 정확한 음정으로 표현하는 패티 김의 가창이 기막히게 어울려 1960년대 후반 스탠더드팝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 ‘구월의 노래’는 그들 콤비가 막 상승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9월의 느낌이 가사 그대로다. 아직 낙엽이 떨어지기는 이른 시기이나, 마음에는 벌써 낙엽이 지고 있다. 여름의 절정이 이제 지나가버린 초가을은, 만물의 몰락을 이미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마치 계절이 멈춰 있는 것처럼 지루했는데 가을부터는 세월이 마구 흘러간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 계절은 이렇게 쉽게도 가는데 /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 (하략)”.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 1980, 조동진 작사·작곡)

초가을 느낌이 이렇게 선명한 노래가 또 있을까 싶다. 초가을의 느낌은 저녁 무렵에 강해진다. 노출된 팔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그 시야에 가로수 이파리와 그 위의 차가운 질감의 가로등 빛, 그리고 도시의 좁은 하늘이 보인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란 너무도 평범하고 무심하게 내뱉는 듯한 한 구절이 이 노래를 살려주는 가장 멋진 부분이다. 단순하게 흘러오던 화성의 흐름도 이 대목에서는 하행의 복잡한 느낌을 만들어 여름을 보내는 복잡미묘한 심사를 만들어낸다. 지겨운 여름이 가는 것은 좋으나, 겨드랑이 사이로 뭔가 스윽 빠져나가는 느낌, 뭔가를 잃어버린 묘한 상실감이 감지된다.

뭔가 지나가고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상실감은 가을의 느낌이다. 그래서 가을과 무관해 보이는 이 노래에서도 가을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며 /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사진>의 ‘사랑이 지나가면’, 1987, 이영훈 작사·작곡)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이 기막힌 표현이라니! ‘떠나가면’ ‘가버리면’ 같은 말들과는 전혀 다른 어감의 ‘지나가면’이란 표현이 이 노래 전체를 압도한다. 이별은 아픔에 눈물이 흐르지만, 화자는 사랑이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라 여긴다. 이별과 상실의 그 고통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는 태도를 가져야 그것을 ‘지나가는’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이 노래는, 소중한 것이 지금 막 지나가고 있는 순간을 영화 속 느린 동작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구사한다.

사랑만 흘러가는 것이랴. 사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1988, 최명섭 작사, 최귀섭 작곡)의 가사처럼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사랑도 영원할 순 없다.

영원할 것처럼 착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계절, 그 상실감에 가슴 한 귀퉁이가 서늘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 말하는 것은, 남자들이야말로 결코 영원하지 않은 자신의 힘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아온,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가을이 되면 그것이 언젠가 무너지고 소멸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허황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누구엔가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남자만큼 어리석은 나도, 이 상실감을 누구에겐가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 그러다, 청소년기 때 읽어 너무도 익숙한 릴케의 ‘가을날’을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이런 얕은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주십시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입니다.’(릴케의 ‘가을날’)

자신을 되돌아보고 깨어나 방황하며 나에게 ‘마지막 단맛’을 채울 이 계절을, 그저 값싼 위로나 넋두리, 투정으로 탕진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신이 만드는 포도송이처럼 ‘완성으로 이끄시어’라는 기도는 감히 할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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