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옷 제발 입지 말라” ...의류회사가 TV쇼 출연자에 사례금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TV를 보면서 유독 눈에 거슬리는 것이 바로 간접광고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 내 쇼핑본능을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불쾌하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이만큼 좋은 홍보수단이 없다. 스타가 드라마에서 착용한 의상이나 액세서리가 그 다음 날로 ‘완판’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기업들은 소위 ‘연예인 협찬’에 목숨을 건다.

그런데 협찬을 의뢰하지 않아도 연예인이 TV에서 자사 브랜드의 옷을 입고 나온다면 업체 입장에서는 이보다 고마운 일도 없을 터. 하지만 미국의 한 의류회사는 TV쇼 출연자에게 자사 제품을 입고 나오지 말아 달라며 사례비까지 제안해 화제다. 애버크롬비&피치가 그 주인공.

최근 애버크롬비는 성명을 내고 MTV의 리얼리티쇼 ‘저지 쇼어(Jersey Shore)’의 출연자 마이클 소렌티노가 자사의 의상을 자주 착용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의 스타일은 우리가 추구하는 패션 철학과 맞지 않는다. 이는 우리 제품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있으므로 소렌티노에게 상당한 액수를 지불해 옷을 입지 않는 것에 합의했다.”

‘저지 쇼어’가 (과격한 표현은 미안하지만) 다소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건 인정한다. 서로 모르는 여덟 명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남녀를 한 집에서 생활하게 하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은 절반이 욕설이다. 그런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자사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불만일 수도 있겠지만, 사건의 본질은 그리 간단치 않다. 애버크롬비는 오랫동안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여 왔다. 제품 카탈로그에는 오직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모델만이 등장하며 흑인이나 아시아 계통 모델은 절대 기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2005년에는 채용과정에서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지원자들의 집단소송에서 패소해 5000만 달러를 배상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애버크롬비가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단지 ‘저지 쇼어’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출연자들이 이탈리아계 미국인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백인 상류층 젊은이들을 주된 소비자로 공략하는 까닭에 이외의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애버크롬비 옷을 입고 TV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고객의 브랜드 충성도가 떨어진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것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며, 단지 제품의 이미지 하락을 우려했다면 조용히 뒷돈을 건네 처리했으면 될 일을 성명까지 발표할 건 또 뭐냐는 것이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이전에는 없었던, 홍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비꼬기도 했다.

어느 제품이나 타깃으로 삼는 고객층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시장에 나온, 따라서 선택의 자유가 이미 소비자에게 넘어간 제품을 두고 대놓고 쓰라 마라 하는 건 명백한 월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버크롬비 제품을 샀건 사지 않았건, 소비자라면 이번 사건에 왠지 모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가뜩이나 경쟁사회에서 사는 게 팍팍해 죽겠는데 제품도 내 맘대로 못 고르고 도리어 제품이 소비자를 선택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김수경씨는 일간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