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서 책 꺼내 읽으면 촌스럽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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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30면

며칠 전 퇴근시간에 서울 을지로 3가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탔다. 제법 승객이 많은 틈에서 ‘낯익은’ 광경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앉아있거나 서있는 승객의 거의 절반가량이 스마트폰이나 태플릿PC 화면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그 많은 승객 중 종이 책을 읽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요사이 전자책(e-book)이 많이 보급되고 있으니 ‘혹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책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살짝 화면들을 엿봤다. 아니었다. 대부분 e-메일이나 트위터 문구를 확인하고 또 연신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강갑생 칼럼

이런 풍경이 어제오늘 얘기도 아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열차 승객들의 손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다. 간혹 책을 읽고 있는 승객이 이방인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출판업을 하는 지인이 들려준 얘기가 있다. 업계 동료들과 의견이 일치된 말이란다. “요사이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읽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하나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상에서 때론 무겁고, 때론 귀찮은 책을 들고 다니는 게 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향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 6월 한 시장조사전문기관이 스마트폰 보유에 따른 한·중·일·대만 독서실태를 조사한 데 따르면 스마트폰 등장 이후 대중교통 이용 시 독서 대신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거 늘었다. 우리나라는 책 대신 휴대전화를 보는 비중이 76%로 4개국 중 가장 높았다. 중국이 75.9%로 뒤를 이었고 대만(54.3%)과 일본(54.1%) 순이었다. 또 ‘스마트폰으로 인해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응답자의 절반가량(48%)이 ‘그렇다’고 답했다. 일본은 19.3%만이 동의했다. 지하철·버스에서 스마트폰에 유독 집착하는 우리네 현실이 투영된 결과다.

그래서 우리 국민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올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0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평균 독서율(1년간 한 권 이상의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은 65%에 그쳤다. 2004년 76%, 2009년 71.7%에서 보듯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성인의 경우 독서의 우선순위는 TV시청, 인터넷, 수면·휴식, 운동, 모임·만남, 집안일 다음으로 7위였다.

이 같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아야 할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서 책이 멀어져 가는 것이 지닌 많은 부작용을 떠올릴 수 있다. 구식 같은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책은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책 자체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중요하거나 꼭 기억하고 싶은 문구에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를 접어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볼 수도 있다. 때론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도 다시 꺼내 당시의 감동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구 하나 하나를 읽으며 좀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접하게 되고 머릿속에 양식을 쌓을 수도 있다.

반면 스마트폰을 통해 얻는 지식들은 단편적이거나 일방의 주장인 경우가 적지 않다.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엔 뭔가 부족하다. 가뜩이나 ‘어른아이’의 증가처럼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현실에서 종이책의 외면은 그만큼 심각하다 하겠다. 어떤 유명인, 어떤 정치인을 좋아하고 지지하면서 그가 쓴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그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에 떠다니는 단편적인 어록이나 행위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책을 스마트 기기가 대신하는 위험성은 아이들에게도 크다. 성장기에 디지털 자극을 자주 접하면 뇌의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고 인지 및 정서 능력을 높이는 데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그것이다.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이 젊은 층의 노안(老眼)을 증가시킨다는 건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독서량 감소로 인해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 출판업계를 살려보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와 관계 없이 그냥 책을 보자는 거다.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자는 거다. 그게 종이책인지, 전자책인지는 다음 문제다.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한 섣부른 판단과 주의·주장은 그만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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