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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가슴 앓는 뉴욕 한인센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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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광복 66주년이었던 지난달 15일 미국 뉴욕에선 ‘이변’이 연출됐다. 뉴욕 퀸스커뮤니티칼리지 내 홀로코스트센터에서 열린 ‘일본군 종군위안부 추모 미술전’ 개막 리셉션에 지역 정치인 7명이 참석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은 돈에 민감하다. 선거자금을 얼마나 모금해 내느냐에 소속당 공천은 물론 당락까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땡전 한 푼 안 생기는 한인 행사에 내로라하는 뉴욕주·뉴욕시 의원이 7명이나 모였다. 두 시간 가까운 기념사 릴레이에도 의원들은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홀로코스트센터는 유대인이 독일 나치의 대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세계 곳곳에 세운 기념관이다. 어느 곳에서나 유대인 사회의 구심점이다. 뉴욕 홀로코스트센터는 루마니아계 유대인으로 퀸스 토박이가 된 쿠퍼버그 가문이 후원한 곳이다. 퀸스커뮤니티칼리지 최대 후원자였던 고 케네스 쿠퍼버그는 원자폭탄 개발작전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뉴욕 홀로코스트센터에서 연 이번 전시회에 지역 정치인이 대거 몰린 데에는 쿠퍼버그 가문의 후광도 한몫했다.

 게다가 일본군 위안부는 여성인권 이슈다. 독도 영유권이나 동해 표기 문제와는 다르다. 미국 정치인 입장에서 보면 독도·동해는 한·일 간 영토 다툼이다. 우리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일본 우익은 내심 반길지 모른다. 국제분쟁으로 부각할 수 있어서다. 이와 달리 위안부는 일본의 아킬레스건이다. 이미 2007년 5월 미 연방하원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7명의 미국 정치인이 한목소리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나선 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뉴욕 홀로코스트센터는 반색할 제안도 했다. 위안부 할머니를 뉴욕으로 초청해 나치 학살 생존자와의 만남을 추진하자는 거다. 동서양의 반인류 범죄 피해자가 한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일본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대인 사회의 심장부 홀로코스트센터에서다. 미국 주류사회에 군국주의 일본의 잔혹한 범죄를 고발하기에 이보다 좋은 ‘멍석’이 또 있을까. 한데 이번 전시회를 이끌어낸 뉴욕 한인유권자센터(KAVC)는 냉가슴만 앓고 있다. 연세 많은 위안부 할머니를 뉴욕으로 모셔올 비용 걱정 때문이다.

 마침 지난달 말 헌법재판소는 정부를 따끔하게 꾸짖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놓고 한·일 간에 분쟁이 있는데도 정부가 팔짱만 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어쩌면 헌재의 질타는 우리 모두의 무관심을 일깨우는 ‘죽비(竹篦·불교에서 참선 수행자의 졸음을 쫓는 법구)’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선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은 한 명도 없다”는 망언의 주인공이 새 총리가 됐다. 그가 앞으로 어떤 망발로 한·일 관계를 흔들어놓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이런 때 비행기표 값을 구하지 못해 뉴욕 홀로코스트센터가 깔아놓은 멍석마저 그냥 접어야 한다면 얼마나 땅을 칠 일인가.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