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 지겹던 고향, 늙어 그리운 감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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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서 감을 팔 때면 엄마가 ‘감 사세요’를 외쳤는데, 이상하게도 내 소리는 정작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화가 오치균(55)의 회고다. 그가 지난 3년간 몰두했던 주제는 감이다.

오치균이 2009년 그린 ‘감’. 가로 80㎝, 세로 160㎝ 대형 캔버스 세 점이 병풍처럼 묶여 한 작품을 이뤘다. 열심히 따고 주워 시장에 내다 팔았던 옛 충남 대덕군 반석리(현재 대전광역시) 고향집 앞마당의 감은 어렵지만 정겨웠던 시절의 상징이 돼 그림으로 살아났다.

 그는 붓 대신 손가락으로 아크릴 물감을 짓이겨 그린다. 몸으로 주물러 나오는 색은 평면 위에 쌓여 질량감을 갖는다. 쏟아질 듯 감을 주렁주렁 이고 있는 오래된 감나무 그림 10점이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 나왔다.

 높은 가을 하늘에 잘 익은 감 빛깔이 선명하다. 추석에 돌아갈 고향집 마당이 꼭 이래야 할 것 같다. 오치균의 감은 어렵지만 정겨웠던 시절의 상징이다.

 충남 대덕군 반석리 태생의 그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 유학을 다녀왔다. 국내 미술시장이 호황을 이뤘던 2007∼2008년, 오치균은 ‘경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10위권 내에 항상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런 그가 감 그림을 내놓으며 ‘어린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을 돌아본다.

 “내 인생의 목표로 제발 여기 고향 땅만 벗어나고자 매달린 건 공부였다. 대학에 들어가 드디어 멀리멀리 고향 땅을 벗어나 다른 일로 돈벌이 투쟁할 때, 그때부터는 그 지겨운 고향 땅이 그리움으로 변했고 빨갛게 떨어진 감잎은 그 어느 시(詩)보다 강렬하게 내 귀 속에 바삭거린다”라고.

 사람 만나기를 피해 두문불출(杜門不出) 하고 있는 작가를 대신해 소설가 김훈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감들은 등불이 켜지듯이 나뭇가지에서 스스로 발화하는 빛처럼 켜져 있다. 오치균이 보여주는 등불의 질감은 강력한 육체성이다. 오치균의 색은 움직이는 살이나 뼈와 같다. 기골(氣骨)이 꿈틀거리고 혈육이 느껴진다.”

 오치균은 내년 6월 도쿄 우에노(上野) 로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2008년 뉴욕 첼시 미술관에 이은 평생 두 번째 미술관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20일까지. 무료. 02-519-08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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