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쓸 카드 다 썼다” 정부 속수무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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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물가 상승률이 5%를 넘어섰다. 통계청은 8월 소비자 물가가 1년 전보다 5.3% 올랐다고 1일 밝혔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5%대에 진입한 건 2008년 9월(5.1%) 이후 3년 만이다. 연평균 물가 상승률 목표를 4%로 잡은 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오르는 물가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가 어느 정도 와야 감당을 하지….” 임종룡 기획재정부 1차관(국무총리실장 내정자)은 이날 정부과천청사에서 물가 관련 브리핑을 하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魔)의 5%대 물가 상승은 ‘채소 충격’에서 비롯했다. 8월 신선채소 지수는 171.2다. 7월에 비해 31.8%, 1년 전보다 21.6% 올랐다.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채소가 밭에서 썩어버린 탓이다. 재정부 이용재 물가정책과장은 “8월 전체 소비자 물가가 7월보다 0.9% 올랐는데 이 중 채소가 차지한 비중이 0.49%포인트”라고 설명했다. 전체 물가 오름세의 절반 이상(53.8%)이 채소 탓이었다는 얘기다. 장마에 취약한 배추(116.9%)와 무(126.6%), 시금치(64.3%), 열무(40.9%) 값이 7월보다 폭등했다.

 지구촌 재정 위기도 물가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세계 경제가 어지러워지자 안전 자산인 금값이 크게 뛰어서다. 금반지가 전체 물가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48%에 불과하지만 전달 대비 소비자 물가 상승분의 17.6%는 금반지 몫이었다. 그만큼 금반지의 가격 상승 폭이 컸다는 얘기다. 쌀·돼지고기 등 일부 품목이 하락세를 보였지만, 전체 물가를 끌어내릴 정도의 폭은 아니었다.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쓸 카드는 거의 다 썼으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한동안 상승세를 보이던 쌀·돼지고기는 8월 가격이 전월 대비 각각 0.7%, 7.3%씩 하락했다. 정부가 비축미를 풀고 수입 삼겹살 관세를 없앤 덕분이다. 정부는 배추·무와 바나나·파인애플의 할당 관세 적용 기간도 연장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계란 가격 안정을 위해 들여온 산란계 병아리도 현재 100만 마리에서 50만 마리를 더 수입하기로 했다.

 관건은 향후 물가다. 정부는 “더 나빠질 일은 없다”고 본다. 재정부는 9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지난해 같은 달 대비 3%대 후반으로 전망했다. ▶최근 국제 유가 하락분이 국내 석유 제품 가격에 반영되면 휘발유·경유 가격이 안정될 테고 ▶이동통신사들이 휴대전화 기본 요금을 9월부터 내리기로 약속했으며 ▶채소값도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 수준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기저효과(基底效果)에 대한 기대도 있다. 물가 상승이 본격화된 시점이 지난해 9월부터인 만큼 물가 상승률 수치가 내려갈 것이란 계산이다. 이용재 물가정책과장은 “최근의 날씨와 국제 유가 등을 감안할 때 8월보다 심각하게 오를 만한 품목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낙관하긴 어렵다. 근원 물가 때문이다. 8월 근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4.0% 올랐다. 28개월 사이 최고치다. 농산물·석유류 등 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근원 물가는 장기적인 물가 흐름을 보여준다. 임종룡 차관은 “기대 인플레이션율과 근원 물가가 꾸준히 오르는 것을 보면 물가에 수요 압력이 지속되는 것”이라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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