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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김정일 방러와 ‘신 만주노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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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곽재원
대기자

지난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대북정책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석거리를 제공했다. 마치 장마 중에 모처럼 나타난 파란 하늘처럼 북한 속살이 내비쳤다.

 우선 미시적인 분석이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3일자 사설에서 “(김 위원장 방러)는 강성대국 건설을 추진하는 역사적인 계기”라고 자찬했다.

 북한은 내년 2월 김정일 위원장 탄생 70주년, 4월 고 김일성 국가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강성대국을 선언할 참이다. 올해는 이를 겨냥한 여러 사업을 종결지어야 한다. 북한의 총동원체제 결산이다. 먼저 과학기술의 총동원이다. 김책제철소를 중심으로 한 특수공법의 철(주체철)생산, 2·8비날론 공장이 주축이 된 합성섬유(주체솜) 생산에 이어 컴퓨터를 활용한 공작기계와 공장자동화(CNC)의 기반을 구축했다. 우리의 1980~90년대 기술 수준이지만 북한으로선 인적·물적 자원을 몽땅 털어넣은 자립경제의 승부수다.

 둘째는 정신무장에 바탕을 둔 인민총동원이다. 평안북도 지역에 건설하고 있는 대단위 수력발전사업인 희천발전소 건설이다. 그들은 과거 속도전으로 경제를 일으킨 천리마운동에 빗대 ‘희천속도’라 부르고 있다. 전 부문에서 참여하는 총동원체제다.

 셋째는 북방외교의 총동원이다. 5월 중국 방문에 이은 러시아 순방이다. 귀환 길에 다시 중국을 들른 것은 이례적이다. 8일간 7000㎞에 달하는 김 위원장의 철도외교는 먼저 후계자 김정은을 위해 중·러 동맹노선을 공고히 깔아두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러시아와 중국 연속방문은 1961년 7월 고 김일성 주석 이래 50년 만의 일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김 위원장이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양어깨를 짚고 물구나무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청진-하산-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부레야-울란우데(북·러 정상회담)-만저우리(중국 네이멍구 자치구)-치치하얼·다칭(大慶)·하얼빈(헤이룽장성)-퉁화·지안(지린성)-만포시(자강도)의 경로는 북한 자원외교의 생명선이기도 하다. 부레야의 수력발전소는 전력공급원이 될 가능성이 크고, 다칭은 대북 원유공급지다. 지난해 북·중 교역 규모는 35억 달러인 데 비해 북·러 교역은 1억 달러에 불과했다.

 김 위원장은 사할린에서 남한으로 이어지는 약 1100㎞의 가스파이프라인(이 중 700㎞가 북한 경유) 사업에도 의욕을 보였다. 북한은 국내의 만성적인 에너지부족을 해소하고 통과료로 매년 1억 달러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사업 몰수로 남측을 압박하면서 파이프라인 사업으로 남북협력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책략도 엿보인다.

 거시적인 분석은 만주경제권을 보는 것이다. 중국-러시아-일본-남북한을 포괄하는 환동해권 경제, 북한-중국 동북3성-러시아 연해주로 나가는 환대륙권, 동해-서해-태평양으로 확대되는 환대양권의 시각에서 공간경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 만주노믹스’의 대두다.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0㎞를 그리면 북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선양(瀋陽), 서쪽으로는 베이징을, 남쪽으로는 상하이, 동쪽으로는 오사카가 들어온다. 이 지역은 세계 경제 성장의 중심지다. 만주 경제권은 그 미래를 담보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북한 분석은 제한된 정보를 토대로 정권 대 정권, 정국 대 정국, 정책 대 정책이란 틀에서 이뤄졌다. 이러다 보니 모든 담론과 분석이 압력솥에서 만들어진 밥같이 평준화되는 형국이다.

 남북문제를 푸는 것은 복잡한 도형문제를 보조선을 그어 푸는 것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지정학적 보조선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곽재원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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